해군사

100년 전 영국-독일 해군 경쟁과 사이에 낀 네덜란드의 선택

Humancat 2007. 1. 21. 23:43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이 해군력 증강 경쟁을 벌일 때 영국과 독일 사이에 낀 네덜란드는 무엇을 했나에 대해 네덜란드 학자 Hubert P. van Tuyll가 쓴 글입니다.
       
독일의 해군력 증강은 네덜란드와 아무련 상관이 없었고, 네덜란드해군의 주력은 본국이 아니라 식민지 인도네시아에 가 있었으며,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가 그토록 믿었던 미국해군의 Mahan 제독의 이론은 네덜란드에서 영향력 "0"였습니다. 아예 네덜란드말로 번역도 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네덜란드는 그냥 구경만 했습니다. 해군력에 관해서는. 1차대전 직전에 전함 9척의 도입을 생각하긴 했지만 이것도 영국, 독일과는 상관이 없고 식민지 인도네시아를 일본으로부터 지키려는 것이었습니다. 
       
-------------------- 
       
요약 번역
     
"1890년 이후 독일의 해군력 증강이 네덜란드해군을 겨눈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독일제국의 군국주의도 네덜란드를 겨눈 것이 아니었다.
    
네덜란드해군의 가장 강력한 함정들은 (강력해봤자 영국이나 독일의 드레드노트 전함 1척을 못당함) 식민지 인도네시아에 배치되었고 본국에는 경순양함 3척, 잠수함 4척과 기타 42척의 소형함만이 있었는데 수병들은 갈수록 명령에 잘 따르지 않았다 (나중에 1933년에는 월급이 너무 적다며 장갑함 De Zeven Provincien에서 반란이 일어나 항공기로 이 배를 폭격하고서야 반란이 진압된 사건도 있었다). 17세기에 얼어붙은 북극해부터 뜨거운 열대의 인도양까지 5대양을 누볐던 해군을 가졌던 나라로서 20세기초 네덜란드해군의 허약함은 놀랄만하다 (번역자 코멘트: 허약하긴 했지만 쓸데없는 함대 건설에 돈 쓰지 않고 1차대전을 피했으니 옳은 결정을 한 셈이다). 19세기말 미국, 영국, 독일에서는 해군력 강화론의 신봉자들이 크게 늘었지만 1912~1913년까지 네덜란드에서 해군력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해군력 강화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미국해군의 알프레드 사이어 마한의 책들이 네덜란드말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네덜란드해군 강화론은 너무 늦었다. 1914년 네덜란드해군은 1905년보다 작았고 1차대전 중에도 줄어들었다.
      


프리-드레드노트형 전함을 반으로 줄인 듯한 장갑함 De Zeven Provincien
네덜란드해군이 실제로 보유했던 가장 크고 강력한 장갑함이지만

영국, 독일의 드레드노트 전함과 비교하면 너무나 약했음
(De Zeven Provincien은 7개의 주, "조선팔도"와 비슷한 뜻) 


1916년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수라바야에 도착하는 식민지방위용 잠수함 KI


네덜란드해군은 외국에서 군함을 건조하는 것을 고려해 1913~1914년에 영국과 독일의 전함들보다 약간 작은 20,000~25,000톤의 전함을 많게는 9척까지 살 생각을 하고 설계를 입찰에 붙였지만 1차대전이 터지면서 취소되었다. 이에 네덜란드해군은 마음을 바꿔 Java급 경순양함 3척을 주문했고 이들은 네덜란드 국내에서 건조된다 (1916년부터 만들기 시작했지만 영국이 독일을 해상봉쇄하면서 네덜란드와 덴마크까지 같이 봉쇄해 자재가 부족했고 결국은 3척 중에 2척만 1925년과 1926년에 차례로 전력화되었다).

네덜란드육군은 네덜란드해군보다 형편이 나았다. 1905년 이후, 특히 1911년~1913년 콜레인 육군장관의 시절에 단계적으로 강화된 네덜란드육군은 1914년 20만명 이상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숫자는 1차대전 중에 거의 2배로 늘었다. 이 병력의 절반은 기동 예비대인 제1군에 배속되었고 나머지는 바닷물을 막기 위해 만들었지만 유사시 터뜨려 침략자를 막아준 둑을 따라 배치되었다. 네덜란드육군의 병력은 독일육군 전체 병력의 1/10인 독일육군 11.5개 사단 정도에 해당했다.

네덜란드육군 전체 병력이 독일육군의 1/10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육군은 전쟁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외교의 도구이기도 했고, 그 존재 자체가 네덜란드는 침략에 맞서 싸울 것이고 네덜란드를 '공짜'로 집어삼킬 수 없다는 분명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육군만으로는 10배 큰 독일육군을 상대할 수 없고 네덜란드의 긴 해안선을 지킬 수도 없었다. 이에 요새 건설이 이 방어 위주의 성향을 가진 나라에게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다. 요새 건설은 각 가상적국에게 (영국과 독일) 네덜란드는 어느 누가 침략해도 맞서 싸울 것이라고 알리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해안선의 요새는 네덜란드가 영국의 침공에 맞서 싸울 것임을 독일에게 알리는 신호였고 실제로 독일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번역자 코멘트: 영국과 독일 둘 다 만약 네덜란드가 스스로를 지킬 의지가 없다면 상대방이 네덜란드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먼저 네덜란드로 쳐들어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잘 짠 계획도 상황에 따라 엉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강대국에게도 마찬가지다) 1차대전 때 네덜란드 정부와 군은 현실적으로 문제에 접근해 약소국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어느 나라가 가상적인지 밝힐 수 없는 중립주의에 묶이고, 부족한 자원과 변덕스러운 여론에 시달렸지만 네덜란드 지도자들은 정세를 올바르게 분석하고, 준비하고, 어느 누가 쳐들어오더라도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히는 어려운 일을 잘 해냈다.

그러나 이 성과는 불행한 유산을 남겨 네덜란드는 다가오는 2차대전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접근해 달라진 정세를 연구하지 않고 1914년에 취해진 조치들의 상당수를 그냥 반복했다.

참고로 유럽의 네덜란드 본국과 아시아의 인도네시아, 남아메리카의 수리남, 카리브 해의 아루바 등의 식민지로 이루어진 네덜란드 제국은 강대국의 호의와 세력 균형 덕분에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전쟁 때 영국은 인도의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를 동원하여 네덜란드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을 1811년 침공해 점령했지만 나폴레옹이 패망한 다음 유럽의 세력균형을 맞추기 위해 1816년 자바 섬을 네덜란드에게 돌려주고 (강한 식민제국이 약한 식민제국에게서 뺏은 식민지를 되돌려준 거의 유일한 사례) 벨기에까지 신생 네덜란드 왕국의 일부로 만들어 네덜란드를 강하게 만들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벨기에는 북부 반쪽 사람들은 네덜란드말을 하지만 남부 반쪽 사람들이 프랑스말을 하고 종교는 거의 다 카톨릭이어서 이미 16세기부터 네덜란드사람들에게 '외국'으로 인식되었고 이런 나라를 억지로 합쳤더니 역시 문제가 많아 곧 내전이 터졌고 1830년 벨기에가 분리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1871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와 싸워 이기고 독일을 통일하자 네덜란드의 동쪽에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했습니다. 독일의 등장으로 유럽의 정세가 복잡하게 되었지만 네덜란드는 이러한 새로운 상황을 잘 이용해 이익을 챙겼고, 네덜란드와 독일의 관계는 꽤 좋았습니다. 그런데 독일의 극단적인 게르만주의자들은 네덜란드가 독일제국의 자연스러운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독일 황제를 포함한 독일 지도층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었고, 비스마르크는 네덜란드가 경제적인 이유로 독일제국에 스스로 편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요약

           

The militaristic rhetoric of Wilhelminian Germany was not aimed at the Netherlands, any more than the German naval buildup after 1890 had anything to do with the Dutch navy.

            

The navy's best ships were deployed to the colonies, with the home fleet only containing 3 light cruisers, 4 submarines, and some 42 small vessels - manned by sailors with an increasing tendency toward insubordination.(27) For a nation so conscious of its naval history, the Dutch navy's weakness is surprising. While advocates of naval growth gained great following in late nineteenth-century America, Britain, and Germany, their voices were not heard in Holland until 1912-13 (perhaps because the famous works of Alfred Thayer Mahan were not translated into Dutch). They were too late; the navy was smaller in 1914 than in 1905, and even shrank during the war.(28) The army fared better. Strengthened in stages after 1905, but especially during the war ministry of H. Colijn (1911-13) (29) the army could mobilize more than 200,000 soldiers by 1914 (the number would almost double during the war), half allocated to the Field Army, the country's mobile force, with most of the balance used to defend the waterlinie.(30) The army's numerical strength equalled about 11.5 German divisions, or one-tenth the total German strength.

          

In one sense, being outnumbered 10 to 1 by a potential adversary did not matter. The Dutch army was as much an instrument of foreign policy as an instrument of war. Its very existence (and its slowly growing strength) was a signal that Holland would be defended, and that an invasion would not be 'free.' on the other hand, the army alone could hardly maintain a sustained defense against such odds, let alone protect the country's lengthy coastline. Fortifications offered one way out of this conundrum, and appealed to a country with a necessarily defensive mentality. Fortifications were also another way of signalling each potential belligerent that Holland would defend itself against the others; for example, coastal fortifications would signal Germany that a British invasion would be resisted. And this is indeed what happened.(31)

                

The navy also considered ordering foreign-built warships, as bids were solicited in 1913-14 for a battleship in the 20-25 thousand ton range (only slightly smaller than those of Britain or Germany) but after the inevitable wartime cancellation, the navy changed its mind and ordered (post-war) some cruisers, which could be and were built in the Netherlands.(44)

      

The Netherlands demonstrated in this era that a small state can take steps to control its own destiny, even though it recognizes that circumstances may destroy its best plans (as is also true for larger nations). The Dutch government and its military establishment approached their problems realistically. Hampered by their necessary neutrality, unable to name even in many documents their most likely adversaries, and working with limited resources and uneven public support, Dutch leaders did a creditable job of analysis, preparation, and signalling their intentions to defend themselves against all comers.

 

The unhappier legacy of all this was that the Netherlands would approach the World War II crisis in a mechanical way, repeating many of the actions taken up to 1914 without studying how the situation had changed. 

 

전체 원문

            

http://www.lib.byu.edu/~rdh/wwi/comment/tuyll1.htm

On the Edge of the Gunpowder Barrel: The Netherlands and the Coming of World War I, 1870-1914


Hubert P. van Tuyll
Augusta College
Augusta, Georgia
© 1995 Hubert P. van Tuy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