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사

[스크랩] 오스트레일리아해군

Humancat 2007. 3. 23. 16:10

오스트레일리아의 건국과 영국해군의 역할

 

오스트레일리아의 건국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첫 총독인 영국해군의 아더 필립 대령이 이끄는 선단이 죄수들을 싣고 뉴사우스웨일즈의 보터니 만에 도착한 1788년 1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이 뉴사우스웨일즈를 첫 정착지로 선택했을 때 이곳을 죄수를 쫓아 보낼 곳으로만 고려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에 근거지를 둔 프랑스와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근거지를 둔 네덜란드는 영국과 인도양의 패권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고 영국은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견제하고 또 필리핀을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던 스페인의 태평양 무역을 차단할 함대를 배치할 곳으로 오스트레일리아를 선택했다. 이렇게 영국해군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건국에서 큰 역할을 맡았고 1901년 오스트레일리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10년이 지날 때까지도 오스트레일리아의 해상 방위는 영국해군의 책임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탄생과 1차대전

 

1901년 독립국이 된 오스트레일리아는 1909년 대영제국 국방 회의에서 독립된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창설을 요구했다. 그 때까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를 포함한 대영제국의 해상 방위는 영국해군에게 맡기고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는 영국해군 예산의 일부를 부담하라는 입장이었던 영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4개국 중에서 독립된 해군의 창설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1911년 <Royal Australian Navy (왕립오스트레일리아해군)>이 창설되었다.

 

처음부터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영국해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당시 최신예 함정이던 인디파티거블급 12인치포 순양전함 1척, 경순양함 6척, 구축함 6척, 잠수함 2척으로 구성된 <Fleet Unit (플리트 유니트)>를 건설했고 함정, 교리, 훈련은 영국해군과 똑같았다. 사실 이 때 오스트레일리아해군 함정에 배치된 대부분의 인원은 영국해군에서 "빌려준" 인원이었고 1913년 설립된 해군사관학교의 졸업생이 참모총장직을 처음으로 맡은 1948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참모총장은 영국해군의 제독이 맡았다.

 


인디파티거블급 순양전함 뉴질랜드 (뉴질랜드정부가 건조 비용을 대고 영국정부에 선물)

 

요즘 기준으로 보면 1개 기동전단에 해당하는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플리트 유니트는 원래 영국해군의 동인도 플리트 유니트 및 중국 플리트 유니트와 합쳐 대영제국 태평양함대를 구성해 인도양과 태평양 전체를 담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914년 1차대전이 터졌을 때 "대영제국의 방위 = 오스트레일리아의 방위"라는 당시의 전략 개념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플리트 유니트는 먼저 인도양의 해상교통로를 지키고 태평양의 독일 식민지들을 공략한 다음 영국으로 가서 그랜드 플리트에 편입되어 북해에서 독일 봉쇄에도 참가했다.

 

1차대전이 끝난 다음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해군은 전함과 순양전함의 비율을 5 : 5 : 3 : 1.75 : 1.75로 맞춰 각자 비율을 넘어 남아도는 함정은 없애기로 했다. 영국해군과 똑같은 함정을 갖고 인원도 상당수가 영국해군에서 빌려온 인원이었던 "작은 영국해군"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영국해군의 일부로 간주되어 영국해군에게 허용된 숫자를 넘어 남아도는 인디파티거블급 12인치포 순양전함 오스트레일리아를 1924년에 자침시킬 수 밖에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이러한 영국해군과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서 당시 세계 최강 영국해군의 최신 함정, 교리, 훈련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사실상 영국해군의 일부가 되어 1960년대 초반까지 영국해군의 빈 틈새를 메우는 전력을 갖추도록 압력을 받기도 했다.

 

가상적국 일본과 싱가포르 전략

 

1922년 영일동맹이 연장되지 않고 끝난 이후 영국은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정하고 극동의 영국 식민지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지킬 전략을 새로 짰다. 이 전략의 내용은 극동에서 일본이 도발하면 지중해에 배치된 영국해군 주력함대를 수에즈 운하와 인도양을 거쳐 싱가포르로 보내 "남중국해의 유틀란트 해전"을 벌여 일본함대를 격파하겠다는 것이었고 <싱가포르 전략>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싱가포르 전략>은 1924년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영국해군의 핵심 전략이었고 오스트레일리아 방위의 기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싱가포르 전략"은 가상적국이 일본 하나 뿐일 때만 실행이 가능하다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1930년대에 들어 가상적국이 되자 대서양과 지중해를 비우고 싱가포르로 주력함대를 보낼 수 없음은 영국해군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뻔한 사실이었다.

 

1939년 2차대전이 시작되자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순양함과 구축함을 지중해로 보내 영국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남대서양과 인도양에서는 통상파괴전을 벌이는 독일의 무장상선을 사냥했다. 자국 주변 해역을 비우면서까지 모국을 돕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안심시키고 일본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1941년 10월 영국은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순양전함 리펄스를 싱가포르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1924년부터 보내겠다고 약속했던 최소 8척의 전함/순양전함으로 구성된 주력함대 대신 싱가포르로 간 이 2척은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영국의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리펄스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겨우 3일이 지난 12월 10일 말레이 반도 동해안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항공대의 육상공격기에게 격침되고 만다. 이어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가 일본군에게 함락된 다음부터 오스트레일리아는 자국의 방위를 미국에게 사실상 의지하게 된다.

 

2차대전 이후 Forward Defence 전략

 

2차대전 이후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전함을 밀어내고 새로운 주력함으로 자리를 굳힌 항공모함을 도입하고 해군항공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영국에서 마제스틱급 경항공모함 시드니와 멜버른을 도입해 각각 1949년과 1956년에 취역시켰다. 마침 1940년대 후반에 들어 서방측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었고 소련의 부추김을 받은 북한이 1950년 남침을 감행하자 오스트레일리아는 서방측의 일원으로서 경항공모함 시드니를 포함하여 육해공 3군을 모두 파병했다. 한국전쟁은 일본의 패망 이후 새로운 적으로 등장한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가 아시아 대륙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겠다는 <Forward Defence (전진 방위)> 전략이 적용된 첫 전쟁이었다. 한국전쟁 참전에 이어 오스트레일리아는 1954년 결성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 SEATO에 뉴질랜드와 함께 가입해서 <Forward Defence> 전략을 공식화하고 1955년부터는 영국이 동남아시아에서 중국의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Far East Strategic Reserve (극동 전략 예비)>에 육해공 3군 병력을 파견했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에게 한국전쟁은 극동의 변두리에서 벌어진 제한전쟁일 뿐이었고 소련과의 전면전쟁이 더욱 중요한 문제였다. 1950년대 전반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유럽에서 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 사이에 전쟁이 나면 극동에 배치된 영국함대가 유럽 전역으로 떠날 것이라고 보고 다음과 같은 계획을 짰다. 중동에서 오토만 터키 제국을 상대로 싸운 1차대전과 북아프리카에서 독일, 이탈리아를 상대로 싸운 2차대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3차대전이 터지면 소련으로부터 중동을 지키기 위해 육군과 공군 부대를 수송하는 선단을 항모기동부대로 호위하고 그 다음 말라야 반도와 같은 다른 곳의 작전에 항모기동부대를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 때 소련의 잠수함이 인도양까지 와서 2차대전의 독일 U보트처럼 통상파괴전을 시도할 것이라고 보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전반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전력 구조를 대잠전에 맞췄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과 같은 시기에 영국제 경항공모함을 운용했던 NATO의 캐나다와 네덜란드해군도 전력 구조가 대잠전에 특화되었는데 이것은 강대한 동맹국과 합쳐서 볼 때 빈 틈새를 메우는 전력을 갖추도록 압력을 받은 결과이다. 사실 영국해군은 호위함이 더 필요하지만 자기 돈 들여 건조하고 운용하기는 싫어 오스트레일리아해군에게 돈이 많이 드는 항공모함과 해군항공대는 포기하고 영국해군의 공격 항공모함에 호위함을 제공하라는 <영연방 동양함대 구상>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연방 동양함대 구상>은 영국해군의 입장에서는 이상적이지만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두 나라의 정부가 의견이 100% 일치하지 않는 한 아무데도 출동하지 못하거나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호위함 없이 영국해군의 항공모함만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어 실현이 불가능했다.

 

인도네시아와의 무력 대결과 베트남전쟁

 

2차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상적국은 독일, 일본과 같은 강대국이었고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어 영국과 힘을 합쳐 대응하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었다. 1950년대 소련이 가상적국이 되고 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될 때도 마찬가지로 1951년 ANZUS 조약을 맺어 공식적인 동맹국이 된 미국 및 영국을 돕는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194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고 소련으로 기울어 군사원조를 받은 인도네시아는 다른 경우였다. 서방측과 소련이 핵전쟁을 벌여 혼란할 때 "북쪽의 이웃"이 오스트레일리아 침공을 시도하면 오스트레일리아는 핵공격을 받아 정신이 없는 영국이나 미국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국을 지킬 수 있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인도네시아와의 무력 대결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다가왔다. 영국이 말레이 반도의 말라야 연방과 싱가포르, 그리고 남중국해 건너 보르네오 섬의 식민지를 하나로 합쳐 말레이시아라는 새로운 나라로 독립시키려고 하자 보르네오 섬의 영국 식민지를 노리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은 1963년 대결 정책을 선언하고 게릴라를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이 선전포고 없는 전쟁은 영국이 핵폭탄 탑재가 가능한 빅터 전략폭격기를 싱가포르에 배치하고 항모기동부대도 보내 전면전쟁 직전까지 갔는데 오스트레일리아는 육해공 3군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 파병해 영국을 적극적으로 도왔고 1965년 10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쿠데타와 군부의 역쿠데타로 수카르노가 권력을 잃자 무력 대결은 1966년에 끝났다. 참고로 인도네시아와의 무력 대결 기간인 1962년부터 1967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해군에서 파견한 대령이 신생 말레이시아해군의 최고 지휘관을 맡아 말레이시아해군을 키웠다.

 

인도네시아와의 무력 대결은 대잠전에 특화된 전력 구조가 오스트레일리아의 방위에는 맞지 않음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영국해군 함정의 설계를 그대로 들여와 구축함과 호위함을 건조하던 것에서 탈피해 대잠전보다는 대수상전에 맞춘 경구축함 DDL의 독자 설계 및 건조 사업이 1966년에 시작되었다. 항공모함 멜버른은 원래 1959년에 고정익 항공기 운용을 1963년에 중단하고 대잠 헬리콥터 모함으로 바뀔 예정이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와의 무력 대결 덕분에 이 결정은 번복되어 1965년 10월 26일 A-4G 스카이호크 전폭기 주문이 발표되었고 이들은 1969년 멜버른에 탑재되어 실전배치된다. 수중전력은 이 때까지 시드니에 배치된 영국해군의 잠수함대에 의지했는데 1967년부터 1978년까지 영국에서 수중배수량 2,400톤의 오베론급 잠수함 6척을 도입해 독자적인 수중전력을 건설했다.

 


원래 공격기이지만 AIM-9 사이드와인더를 달고 함대방공 전투기로 사용된 A-4G 스카이호크

 

오스트레일리아 육해공 3군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참전한 베트남전쟁은 <Forward Defence> 전략이 실행된 마지막 전쟁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수송함으로 개조된 경항공모함 시드니에 병력과 물자를 실어 베트남으로 날랐고 1967년부터는 오스트레일리아해군 역사상 영국이 아닌 미국에서 도입한 첫 함정인 DDG-2 찰스 F. 애덤스급 방공구축함 3척 중의 1척인 호바트를 보내 북베트남 해안 포격에 투입했다. 호바트는 1968년 6월 17일 레이더 스코프에서 호바트를 북베트남군 헬리콥터로 오인한 미국공군 F-4 팬텀 II 전폭기가 쏜 AIM-7 스패로를 3발 맞고 2명이 사망하는 황당한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Defence of Australia와 Sea-Air Gap, 그리고 항공모함의 포기

 

1969년 닉슨 미국대통령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손으로 직접 하라는 <괌 독트린>을 발표하고 1971년 영국군이 싱가포르에서 철수한 다음 1973년 베트남전쟁이 미국이 무책임하게 발을 빼는 모양으로 일단 끝나자 오스트레일리아는 갑자기 외톨이가 되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동맹국들은 이제 알아서 자신을 지키라는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국방 정책도 아시아 대륙에서의 <Forward Defence>를 버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본토 방위에 맞춘 <Defence of Australia (DoA)>로 바뀌었고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여기에 맞춰 전력 구조를 새로 짜게 된다.

 

<Defence of Australia>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해역 <Sea-Air Gap>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침공하려는 적을 저지한다는 개념이다. <Sea-Air Gap>의 제공권을 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와 서부 지역에 새로운 공군기지 4개가 건설되었고 또 이 해역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진달리 (Jindalee) 초수평선 레이더 개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원래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를 폭격할 수 있는 수단으로 도입된 24대의 F-111C 전폭기는 미국공군의 F-111에는 없는 AGM-84 하푼 공대함미사일 운용능력을 얻었다. 말레이시아 북부의 버터워스 공군기지와 싱가포르의 텡가 공군기지에 배치되었던 전투기 부대는 운용 기종을 미라지 III에서 1980년대 중반 F/A-18 호네트로 바꾸면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대신 오스트레일리아 본토 북부 지역에 새로 만든 틴덜 공군기지에 배치된다.

 

단순한 수송함에서 1971년 헬리콥터를 탑재하는 상륙함 LPA로 역할이 바뀐 시드니는 해군 함정에서 발진하는 공군 헬리콥터에 육군 병력을 태우는 3군 통합작전 플랫폼으로서 여러 훈련을 통해 새로운 운용 개념을 개발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이 끝나고 해외 원정보다는 본토 방위에 주력하게 된 정세 변화에 따라 필요 없다는 판단이 내려져 1973년 11월 퇴역하고 1975년 우리나라의 동국제강에 고철로 팔려 해체되었다. 그러나 상륙전력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영국의 써 랜슬롯급 LSL의 설계를 들여와 현대화한 전차상륙함 토브룩이 1981년 취역해 2차대전 이후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첫 상륙함이 되었다.

 


시드니와 멜버른

 

A-4G 스카이호크를 운용하는 경항공모함 멜버른은 함령이 오래되어 후계함이 필요했는데 마침 영국이 1980년 취역한 최신형 경항공모함 인빈서블을 오스트레일리아에게 팔겠다고 1981년에 제안했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멜버른을 인빈서블로 교체하기로 결정했지만 1982년에 터진 포클랜드전쟁 때문에 영국해군이 인빈서블을 계속 보유해야만 하게 되어 멜버른을 후계함 없이 1982년 6월 30일 퇴역시켰다. 영국은 인빈서블 대신 허미즈를 팔겠다고 제안했지만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허미즈는 너무 크고 또 멜버른만큼 함령이 오래되어 거부하고 대신 <Defence of Australia>에 더 적합한 신형 잠수함 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경항공모함을 포기하고 잠수함대의 강화를 선택한 이 역사적인 결정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영국제 오베론급 잠수함 6척을 교체할 신형 잠수함의 후보로 1985년 독일의 IKL 2000과 스웨덴 코쿰스의 471형 설계를 선정하고 1987년 471형을 채택한다. 참고로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오베론급 잠수함은 1978년부터 1992년까지 베트남의 캄란 만을 드나드는 소련해군의 함정에 따라붙어 소음을 녹음하고 때로는 몇 미터 안까지 바짝 붙어 수중 사진을 찍었는데 471형도 앞으로 같은 임무를 수행할 계획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오베론급 잠수함이 인도네시아와 인도에 대해서도 몰래 정보 수집 활동을 수행했음은 물론이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현재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1966년부터 추진했던 경구축함 DDL 사업을 과다한 비용 때문에 1974년 중단하고 대신 미국으로부터 FFG-7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을 4척 도입해 1980년 1번함을 취역시켰다. 1986년 현재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12척의 수상전투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구성을 살펴 보면 1960년대에 미국에서 건조한 3척의 DDG-2 찰스 F. 애덤스급 방공구축함, 역시 미국에서 건조한 4척의 FFG-7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 영국 설계를 들여와 1960년대에 자국에서 건조한 12형 리버급 호위함 5척이었다. 여기서 FFG-7형 호위함 2척이 국내에서 건조되어 1990년대 전반에 새로 취역했고 리버급 호위함을 교체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독일의 MEKO 200ANZ와 네덜란드의 카렐 두어만을 비교 검토하고 1989년 11월 뉴질랜드해군과 함께 MEKO 200ANZ형 호위함을 8척과 2척씩 오스트레일리아 국내의 조선소에서 건조하기로 발표했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1994년 국방백서에서는 17척의 수상전투함 확보가 목표라고 밝혔지만 1990년대 내내 실제로는 11척만 있었다. 1997년에는 DDG-2 찰스 F. 애덤스급 방공구축함 3척을 후계함 없이 퇴역시키기로 결정해 목표가 14척으로 줄었고 다시 2000년 국방백서에는 FFG-7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 6척을 새로운 방공구축함 3척으로 바꾸기로 해서 11척으로 줄었다. MEKO 200ANZ형 호위함은 1994년 1번함 앤잭이 진수되어 1996년 취역했고 올해 9월 마지막 8번함 퍼스가 취역할 예정이다. 6척의 FFG-7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은 1993년부터 업그레이드가 검토되어 독일제 TRS-3D/32 3차원 레이더를 달아 성능은 더 낫지만 리스크도 큰 테닉스의 제안을 제치고 싸고 안전한 ADI의 제안이 1998년 11월 채택되었다.

 

1981년 취역한 상륙함 토브룩만 있던 상륙전력에는 1994년 미국에서 헐값에 사온 뉴포트급 LST 2척 마누라와 카님블라가 추가되었다. 원래 계획은 1억 2천만 오스트레일리아 달러를 들여 이 2척의 LST를 각각 450명의 육군 병력을 태우고 4대의 육군 S-70A 블랙호크 헬리콥터와 2척의 LCM8 상륙정을 탑재할 수 있는 작은 헬리콥터 모함인 LPA로 개조해서 1997년에 전력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년 넘은 낡은 선체의 수명을 연장하고 발암물질 석면을 제거하다가 비용이 원래의 3배를 넘는 4억 오스트레일리아 달러까지 들고 3년 늦게 2000년에야 전력화되어 이 사업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전력화가 늦어져 상륙함이 절실히 필요했던 1999년의 동티모르 사태에 출동하지 못했던 마누라와 카님블라는 2001년 이라크 해상봉쇄와 2003년 이라크전쟁에 교대로 참전했고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치안유지와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재해구호에도 참가했다.

 

3척의 DDG-2 찰스 F. 애덤스급 방공구축함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매년 차례로 후계함 없이 퇴역해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DDG-2에 달린 SPS-52 장거리 3차원 레이더가 제공했던 구역방공능력을 잃게 되었다. DDG-2의 후계함으로 미국에서 DDG-993 키드급 NTU 방공구축함 4척을 도입하는 것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검토되었지만 중고 뉴포트급 LST 2척이 만든 나쁜 선례 때문에 또 중고 함정을 미국에서 사올 수는 없었고 대신 본격적인 방공구축함을 새로 건조하는 SEA 4000 사업이 시작되었다.

 

Defence Capability Plan 2004-2014

 

오스트레일리아정부는 2003년 11월 <Defence Capability Plan>을 발표하면서 2004년부터 2014년까지 육해공 3군의 전력증강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이 계획에 따라 2014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이 건설할 함대는 다음과 같다.

 

사업 명

척수

내용

한국해군의 유사한 사업

JP2048

대형 상륙함 LHD 건조

2

스페인 27,000 BPE 설계

프랑스 22,000톤 미스트랄 설계

LPX

SEA4000

방공구축함 AWD 건조

3

미국 Gibbs & Cox 6,500톤 설계

스페인 F100 설계

KDX-III

SEA1390

FFG 업그레이드

4

SM-2 운용 능력 부여

(SEA4000 방공구축함 취역에 따라 퇴역)

KDX-II

SEA1448

앤잭 대함 미사일 방어

8

CEA-FAR 위상배열 레이더 설치

KDX-I

SEA1439

콜린스급 전투체계 교체

6

미국 버지니아급의 BYG-1 전투체계 설치

SSX

 

JP2048 대형 상륙함 LHD 건조

 

이 대형 상륙함 건조 사업은 2000년부터 제인스 인터내셔널 디펜스 리뷰에 보도된 <MRA, Multi-Role Auxiliary>와 <LSS, Littoral Support Ship> 개념이 구체화된 것이고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군 통합작전 플랫폼으로 잠시 사용되었던 헬리콥터 모함 시드니의 부활이라고 볼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이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1999년의 동티모르 사태이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1975년 독립하자마자 인도네시아의 침략을 당해 인도네시아의 식민지가 된 동티모르는 1999년 8월 30일 UN이 감독한 국민투표를 통해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하기로 결정했지만 인도네시아가 지원하는 민병대가 살인, 파괴, 약탈을 저질러 1999년 9월 무법천지가 되었다. 이에 오스트레일리아가 주도하는 UN 평화유지군이 인도네시아군의 위협을 무릅쓰고 동티모르에 파병되었는데 이 때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유일한 상륙함 토브룩만으로는 병력과 물자를 다 보낼 수 없어 고속 쌍동선 저비스 베이를 민간 회사에서 빌려 투입해야만 했다. 동티모르의 경험을 통해 1,000명의 병력을 태울 수 있는 대형 상륙함 LHD의 소요가 제기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국방부는 2010년까지 토브룩을 이 LHD 1척으로 교체하고 마누라와 카님블라는 2015년에 또 다른 1척으로 교체하기로 2003년에 결정했다.

 

스페인의 BPE와 LSS

 

LHD에는 2000년의 MRA와 LSS 개념과 마찬가지로 쭉 뚫린 넓은 비행갑판이 있고 6대의 헬리콥터가 동시에 이함 또는 착함할 수 있다. 현재 스페인의 27,000톤 BPE와 프랑스의 22,000톤 미스트랄의 설계를 검토하고 있는데 2007년에 설계를 선정해 2012년에 1번함을 전력화하는 것이 목표이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 일부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공군이 100대까지 도입하려고 하는 F-35 조인트 스트라이크 파이터의 일부를 수직이착륙이 가능한 F-35B형으로 사서 LHD에서 운용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고 국회에서도 이 주장의 타당성을 연구하도록 추천했지만 현재로서는 소수의 의견에 그치고 있다.

 

SEA4000 방공구축함 AWD 건조

 

SEA4000 방공구축함 (AWD, Air Warfare Destroyer) 건조 사업은 1999~2001년 3척의 DDG-2 찰스 F. 애덤스급 방공구축함이 퇴역하면서 잃은 구역방공능력을 다시 얻기 위해 2000년부터 추진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2013년 1번함이 인도될 AWD의 후보로 미국 Gibbs & Cox가 제안한 DDG-51 알레이 버크의 축소형 “베이비 버크”, 스페인의 F100, 독일의 F124, 오스트레일리아 자국산 CEA-FAR 레이더를 단 MEKO D와 MEKO X, 그리고 미국의 DD(X)를 검토했고 2004년 8월 전투체계를 미국의 이지스로 정했다. 선체의 설계에서는 2005년 8월 Gibbs & Cox가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Gibbs & Cox의 설계가 선택된 것은 아직 아니고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요구에 맞게 변경된 스페인의 F100과 비교 검토해서 올해 안에 결정이 날 예정이다. 여기서 Gibbs & Cox가 2000년에 제안한 <인터내셔널 프리깃/이지스 FFG>의 사양을 알아보면 5,875톤의 선체에 48셀의 Mk41 수직발사기가 들어가고 4면 고정식 SPY-1D 레이더가 상부구조물에 설치된다. SPG-62 조사기는 3대가 있는 DDG-51 알레이 버크와 달리 2대만 달리고 추진기관은 DDG-51처럼 LM2500 가스터빈 4대가 있지 않고 LM2500 가스터빈 2대에 디젤 2대를 같이 쓰는 CODOG으로 바뀐다. 오스트레일리아국방부는 2004년 8월 이지스 전투체계의 선정을 발표하면서 SPG-62 조사기 대신 자국산 CEA-MOUNT 능동 위상배열 조사기를 쓰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고 만약 CEA-MOUNT가 채택된다면 AWD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나중에 건조되면서도 또 가장 독특한 이지스 방공구축함이 될 것이다.

 


AWD

 

AWD의 작전 개념에 대해서는 2000년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이 주최한 <21세기 해양전 - 중소해군의 관점>에서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Tim Cox 준장이 발표한 논문이 있다. 이 논문의 내용은 인도네시아로 추정되는 가상적국의 해안으로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상륙함대가 접근하면 가상적국의 해군과 공군은 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나와서 싸워야 할 것이고, 이들이 나오면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AWD와 오스트레일리아공군의 전투기, 조기경보기, 공중급유기가 발전된 지휘통제 네트워크를 통해 유기적으로 결합된 합동작전을 수행하여 적의 공군과 해군을 격멸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대서양에서 소련의 백파이어 폭격기를 상대로 방어적으로 싸우지 않고 북극 바로 아래의 바렌츠 해로 쳐들어가 그곳에서 백파이어 폭격기를 격멸해 대서양 해상교통로에 대한 위협을 뿌리째 뽑아버리겠다는 1980년대 미국해군의 <Maritime Strategy>의 축소판이다. 참고로 작년 10월 오스트레일리아의 Kokoda 재단이 발표한 F-35 구매 관련 리포트에서 예상한 2가지 전쟁 시나리오 중의 하나는 동티모르와 주변 대륙붕을 놓고 어떤 강대국의 지원을 받는 인도네시아와 싸우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정부 상태인 소말리아에 미국과 함께 파병하는데 마침 센카쿠 제도를 중국이 점령해 버리고 일본을 위해 미국이 조직한 동맹군에 오스트레일리아가 참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SM-2의 사거리 바깥 쪽의 안전한 공역에서 아군 함정을 감시하는 정찰기의 도움을 받으며 적의 공격기가 레이더 수평선 (약 30km로 가정) 너머에서부터 해면에 바짝 붙어 다가와 공대함 미사일을 쏘고 도망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의 국방과학연구소 DSTO의 연구원들이 기발한 제안을 했다. 그 내용은 미사일 유도에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의 매우 정확한 데이터를 제공하도록 진달리 초수평선 레이더를 개량하고, 이 진달리 초수평선 레이더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AWD에 전달하는 메커니즘을 개발해서, SM-2에 AMRAAM의 능동탐색기를 단 SM-6 ERAM으로 수평선 너머의 적기를 잡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기가 쏜 공대함 미사일만 요격하고 적기는 놓치면 SM-2를 다 쏜 다음에는 결국 아군 함정이 도망갈 수 밖에 없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참신한 발상이지만 2003년 발표 이후 아직 소식이 없다.

 

SEA1390 FFG 업그레이드 (FFGUP)

 

FFG 업그레이드 사업은 AWD가 취역할 때까지 제한적인 구역방공능력을 갖추기 위한 사업이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1999년 6월 ADI와 계약을 맺고 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핵심적인 내용은 전투체계, 사격통제체계, 레이더를 바꾸고 ESSM 32발이 들어가는 Mk41 수직발사기 8셀과 자국산 CEA-MAST 자료융합체계를 새로 설치하는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FFG-7은 업그레이드를 마치면 40발의 SM-1 MR에 32발의 ESSM이 추가되어 전세계의 FFG-7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을 갖추고 레이더와 전투체계도 가장 신형으로 바뀔 예정이었지만 2001년 9월 11일 테러 이후 테러리스트 소탕 및 해상 차단 작전에 동원되면서 일정이 30개월이나 늦어졌다. 결국 2003년 11월 6척 중에서 4척만 업그레이드하고 2척은 퇴역시키기로 결정되어 작년 11월 2번함 캔브라가 퇴역했고 1번함 아들레이드도 곧 따를 것이다. 그러나 남은 4척은 SM-1 MR을 SM-2 Block IIIA로 바꾸고 우리 KDX-II의 WDS Mk14를 추가해 KDX-II와 비슷한 구역방공능력을 갖게 될 예정이고 현재 가장 먼저 업그레이드가 실시된 6번함 시드니가 해상 시운전을 하고 있다.

 

SEA1448 앤잭 대함 미사일 방어 (ANZAC ASMD)

 

1996년부터 전력화된 앤잭급의 자함방공능력은 처음에는 8발의 RIM-7P 시스패로만으로 무장하고 추적 레이더는 1대의 Ceros 200뿐이며 표적지정 레이더 9LV 453 TIR은 3차원이 아닌 2차원인 매우 빈약한 수준이었다. 사실 앤잭은 독일 MEKO 200의 선체에 스웨덴 Goteborg의 (유테부리라고 발음한다) 레이더와 전투체계를 얹은 것이고 나중에 장비를 추가할 공간을 남겨 놓고 일단 건조부터 한다는 <fitted for but not with> 사상의 전형적인 경우이다. 앤잭의 남은 공간을 채우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은 1995년 10월 SPS-48E 3차원 레이더를 작게 만든 SPS-48F 3차원 레이더와 Mk74 Mod14/15 사격통제체계를 설치하는 타당성 연구부터 시작해서 매우 다양한 가능성을 조사했고 1996년 앤잭 WIP (Warfighting Improvement Program) 사업을 시작했다. 앤잭 WIP 사업에서 검토한 레이더는 미국 SPY-1F, 네덜란드 SMART-L/APAR, 영국 SAMPSON, 그리고 자국산 CEA-FAR이었다. 그러나 선체가 너무 작아 예를 들어 SAMPSON을 설치하려면 멀쩡한 선체를 반으로 잘라 대형 발전기가 든 플러그-인을 넣고 다시 붙여야 하는 엄청난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되어 1999년 11월 ANZAC WIP 사업은 취소되었고 대신 제한적인 대함 미사일 방어 ASMD 사업이 시작되었다. 이 사업에서는 스웨덴의 Sea Giraffe AMB 3차원 표적지정 레이더를 다는 제한적인 업그레이드 등을 검토하다가 2004년 3월 자국산 CEA-FAR 능동 위상배열 레이더를 설치해 해상 시험을 했고 드디어 작년 9월 CEA-FAR과 CEA-MOUNT를 설치하기로 결정되었다. CEA-FAR는 새로운 마스트에 6면 고정식으로 설치되고 CEA-MOUNT는 그 아래에 4면으로 설치될 예정인데 이 시스템은 ESSM을 10개의 표적에 동시에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이밖에 앤잭에는 프랑스의 VAMPIR NG 적외선탐색추적장치도 추가된다. 취역할 때는 KDX-I보다 빈약했던 앤잭이 이제 KDX-I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ANZAC ASMD

 

SEA1439 콜린스급 전투체계 교체

 

1996년 1번함이 취역한 콜린스급은 세계에서 가장 큰 통상동력 잠수함인데 물이 새고, 시끄럽고, 전투체계의 데이터 처리속도가 너무나 느려 “잠수함 이렇게 만들면 안 된다”는 실패 사례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1999년 전력화된 3번함 월러가 2000년 림팩 훈련에서 미국해군의 SSN 2척을 ‘격침’시키고 이어 2001년의 탠덤 스러스트 훈련에서는 자신의 전체 길이보다도 얕은 연안에서 미국해군의 대형 상륙함 2척을 ‘격침’시켜 실력을 과시했다. 현재 콜린스급에서 물이 새거나 시끄러운 소음이 나는 문제는 해결되었고 음탐기의 영상을 입력하면 처리 속도가 너무나 느려 지나간 과거의 전술상황을 보여준다고 해서 악명 높았던 미국 록웰이 만든 전투체계는 미국해군 버지니아급 SSN의 BYG-1으로 교체되고 있다. 참고로 월러의 첫 함장 멜 존스 해군중령은 영국해군 출신으로 영국해군에서 업홀더급 잠수함의 함장을 역임한 다음 가족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와서 오스트레일리아해군으로 직장을 옮겼다. 오스트레일리아해군에는 이처럼 영국해군 출신이 상당수 있어 1911년 왕립오스트레일리아해군 창설부터 지금까지 인적 교류가 아직도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콜린스급 잠수함은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이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도입할 경우 토마호크를 장비하게 될 가장 유력한 함정이지만 아직은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다.

 

 

 

출처 : When Computers Went To Sea
글쓴이 : 백선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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