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전쟁

[스크랩] 포클랜드전쟁 - 산 루이스의 전투 기록

Humancat 2007. 3. 6. 09:56

포클랜드로 다가오는 영국해군 기동부대를 요격하기 위해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 시다트 함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42형 방공구축함 2척을 주력으로 하는 79.1 기동부대와 경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 엑조세 MM38 함대함 미사일로 무장한 섬너급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79.3 기동부대가 출동한 1982년 4월 27일에 앞서 아르헨티나해군은 가지고 있던 3척의 잠수함 중의 1척인 <산 루이스>를 4월 11일 출동시켰다.

          

<산 루이스>는 1974년 독일에서 구입한 209형 잠수함 2척 중의 1척이었고 (다른 1척은 <살타>였다) 209형 잠수함은 1967년부터 독일의 선박건조회사 <Kieler Howaldtswerke>가 수출용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한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이었다. 첫 주문은 1967년 그리스해군으로부터 왔고 2년 지나 1969년 아르헨티나해군이 2척을 주문해 두 번째 고객이 되었다. 그리스해군이 주문한 4척은 209/1100형으로 잠수했을 때의 배수량이 약 1,200톤이었고 아르헨티나해군이 주문한 2척은 209/1200형으로 약간 더 커서 물 속에서 배수량이 거의 1,300톤에 달했다.

 

<산 루이스>의 자매함 <살타>

        

<산 루이스>의 승조원은 32명이었고, 최대 속력은 물 위로 공기 흡입/배출 파이프인 <스노클>을 올렸을 때는 11 노트, 물 속에서는 21.5 노트에 달했으며, 항속거리는 스노클을 올리고 8 노트로 달릴 때 8,000 노티컬 마일, 물 속에서 배터리를 써서 4 노트로 달릴 때는 400 노티컬 마일이었다. 화력통제장치와 무장을 보면 <산 루이스>는 화력통제장치로 네덜란드의 시그날(Signaal)이 만든 M8-24를 가지고 있었고, M8-24는 3개의 표적에 대고 각각 발사된 3발의 어뢰를 동시에 유도할 수 있었다. 무장으로는 수상 표적에 대고 쏠 직경 553mm의 독일제 SST-4 (여러 매체에 보도된 바와 달리 SUT 어뢰가 아니었다) 어뢰, 수중 표적에 쏠 직경 483mm의 미국제 Mk37 어뢰가 있었으며, 모두 합쳐 14발을 싣고 어뢰발사관은 8개가 있었다. 출동할 때 <산 루이스>는 SST-4 10발, Mk37 4발을 싣고 있었다. 참고로 1987년 우리 해군이 주문한 3척은 209/1200형인데 겉보습이 좀 다르고 안에 들어간 장비들은 20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대부분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출동하고 6일 지난 4월 17일, <산 루이스>는 영국이 4월 12일부터부터 봉쇄하겠다고 4월 7일에 발표한 포클랜드 주변 200 노티컬 마일의 바다인 <Maritime Exclusion Zone, MEZ>의 가장자리에 도착했고,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막판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MEZ 바깥 쪽에서 대기했다. 그러나 4월 19일 <산 루이스>의 머리 역할을 하는 M8-24 화력통제장치가 고장이 나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장 난 M8-24는 고칠 수 없었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아르헨티나 본토의 사령부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통신 안테나를 물 위에 내놓고 M8-24의 어디가 어떻게 고장 났다는 무선 보고를 보내다가는 영국이 이것을 엿듣고, 게다가 전파가 날아온 곳을 삼각 측정해서 <산 루이스>의 위치를 알아낼 위험이 너무나 컸다. 결국 <산 루이스>는 M8-24의 3발 동시 유도 능력을 잃고 한번에 어뢰 1발을 하나의 표적에만 컴퓨터가 아닌 사람이 직접 사격 제원을 산출해서 쏠 수 있게 되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막판 협상이 결렬되자 <산 루이스>는 MEZ 안으로 들어가 포클랜드의 수도인 <포트 스탠리>의 북쪽 연안을 초계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4월 28일 초계 위치에 도착했다. 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영국 땅인 아센션 섬에서 출격한 영국공군 벌컨 B2 폭격기가 스탠리 비행장의 활주로를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5월 1일, 영국해군 기동부대 사령관 <샌디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포트 스탠리의 북쪽 약 20 마일 떨어진 곳에 있을 <산 루이스>를 찾아 격침시키도록 22형 호위함 <브릴리언트>와 12M형 호위함 <야무스>를 보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 허미즈에서 <토니 호그> 해군소령이 이끄는 영국해군항공대 826대대의 시킹 HAS5 헬리콥터 3대가 각각 4명의 예비 승무원을 태우고 허미즈로부터 180 마일 떨어진 <산 루이스>의 추정 위치로 날아갔다.

 

남대서양의 거친 파도와 싸우는 <브로드소드> (<브릴리언트>의 동형함)

          

우드워드 사령관이 <산 루이스>를 잡으러 함정 2척과 헬리콥터 3대를 마침 <산 루이스>가 있던 곳으로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영국군이 오면 곧장 포트 스탠리 주변에 상륙작전을 벌일 것으로 생각하고 <산 루이스>를 포트 스탠리의 북쪽 약 20 마일 위치로 보내는 아르헨티나해군의 무선 명령을 영국군이 엿들었기 때문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시킹 HAS5 헬리콥터 3대는 함정에 로프를 내려 예비 승무원들을 내려놓고 <산 루이스>를 찾기 시작했고 <브릴리언트>에 실린 링스 HAS2 헬리콥터 2대와 <야무스>에 실린 워스프 HAS1 헬리콥터 1대도 <산 루이스> 사냥에 합류했다. 헬리콥터들의 잠수함 사냥은 무려 10시간 이어졌다. 3대의 시킹 HAS5는 함정의 위에서 공중 정지한 채로 호스를 잇고 15분 동안 연료를 채우는 <HIFR>를 실제 전투에서 처음으로 실행하면서 3대 합쳐 모두 10번 급유를 받았고, 예비 승무원도 비슷한 방법으로 공중 정치한 헬리콥터로 올라가서 5시간여의 잠수함 사냥에 지친 승무원들과 교대했다. 이들은 <산 루이스>를 찾던 10시간 동안 Mk11 폭뢰 6발, Mk46 어뢰 2발을 잠수함으로 생각되는 표적에 대고 쐈지만 <산 루이스>는 무사했다. 이 때 거의 0.5 마일 길이의 기름 띠가 바다로 떠올라 영국해군은 <산 루이스>가 격침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침몰한 포경선의 잔해를 부순 것이었다.

             

영국해군은 뭔가 탐지되면 주저 없이 폭뢰나 어뢰를 던졌는데 이것은 폭뢰나 어뢰 아끼려다가 잠수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고, 또한 탐지된 것이 정말로 잠수함이면 도망가려 할 것이고 아무 것도 아니라면 가만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영국해군은 물속에서 뭔가 탐지되면 폭뢰나 어뢰를 던져 탐지된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식별했던 것이다. 평시와 달리 전시에는 뭔가 탐지되었을 때 빨리 그것이 진짜 잠수함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고, 자신이 살기 위해 “의심되면 일단 쏘고 본다”는 본능이 발동된다. 이런 이유로 6월 14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해군은 200여 발의 폭뢰와 어뢰를 쏴댔고 전쟁이 끝난 다음 식별용으로 좀 더 싼 대잠무기를 찾게 된다.

               

3대의 시킹 HAS5 중의 1대인 VX577이 10시간 20분 동안 하늘에 떠 있는 당시 세계신기록을 세울 때 <산 루이스>는 자신을 잡으러 온 <브릴리언트>와 <야무스>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5월 1일 오전 9시 40분, <산 루이스>의 영국제 186형 음탐기에 영국 함정이 내는 것으로 들리는 소음이 잡혔다. 여기서 <산 루이스>의 함장 <Fernando Azcueta> 해군중령이 전쟁이 끝나고 5년이 지난 1987년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영국의 역사가 <마틴 미들브룩>에게 밝힌 인터뷰 내용을 보자.

             

“우리는 작전에 대해 충분히 준비를 하지 못한 채로 전혀 적절하지 못한 상황에서 명령을 받고 출동했습니다. 상황이 나았더라면 성공적인 작전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새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승조원들이 아직 충분히 훈련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승조원들을 (1982년) 1월에 받았고, 나는 이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해낸 일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이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날 (1982년 5월 1일) 아침 우리는 영국 함정 1척을 (영국제) 186형 음탐기로 탐지했습니다. 나는 3척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수중 소음이 너무 많아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약 20 노트의 고속으로 달리고 있었고, 프로펠러 소음은 중간쯤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잠망경으로 볼 수 없었고 모든 일은 수동 음탐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10,000에서 14,000 야드 사이에서 공격했습니다. 나는 독일 AEG가 만든 유선 유도 SST-4 어뢰 1발을 오전 10시 5분에 쐈습니다. 이 공격은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화력통제장치의 핵심인 주 관제 컴퓨터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컴퓨터는 4월 19일에 고장이 났습니다. 결국 컴퓨터 없이 화력통제를 맡은 팀이 수동으로 어뢰를 쏴야만 했습니다. 나는 좋은 화력통제 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컴퓨터가 고장 난 다음부터 쭉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습니다. 또한 내 생각에는 어뢰를 쏘고 몇 분 지나 유도선이 끊어졌습니다. 우리는 좀 떨어진 거리에서 몇몇 폭뢰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고, 대잠 어뢰 소리도 들은 것 같습니다만 영국의 반격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산 루이스>는 표적이 <브릴리언트>인지 또는 <야무스>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로 9~12km 거리에서 SST-4 어뢰 1발을 사람이 직접 사격 제원을 산출해서 쐈지만 유도선이 곧 끊어져버렸고 SST-4 어뢰는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 Mk11 폭뢰 6발, Mk46 어뢰 2발을 퍼부은 영국의 반격 또한 허탕을 친 셈이었다. 이 때 <산 루이스>는 바다의 바닥에 가만히 내려 앉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엔진을 꺼서 영국의 반격을 피했는데, 당시 영국해군이 쓰던 Mk46 어뢰는 바닥에 내려 앉은 잠수함이나 물 위로 떠오른 잠수함은 표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Mk46 어뢰는 물 위로 떠오른 잠수함도 공격할 수 있도록 개량된다. 바닥에 내려 앉은 잠수함의 경우, 이 때 영국 함정에 1950년대의 림보 (Limbo) 폭뢰투사기가 있었더라면 폭뢰를 퍼부어 <산 루이스>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림보 폭사투사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이미 구시대의 무기로 간주되어 22형 호위함 <브릴리언트>에는 아예 설치되지 않았고, 원래 림보 폭사투사기가 달려있었던 12M형 호위함 <야무스>는 10여 년 전에 헬리콥터 비행갑판을 새로 만들면서 림보 폭사투사기를 떼어버렸다. 북대서양의 깊은 바다에서 소련 핵추진 잠수함을 잡기 위해 만든 함정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남대서양 포클랜드 주변의 얕은 바다에서 독일제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을 사냥하다 보니 생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5월 8일, <산 루이스>는 불과 2,000 야드 거리에서 영국 잠수함으로 생각되는 소리를 듣고 미국제 Mk37 어뢰를 1발 발사했다. 한참 지나 폭발음이 들렸는데 Azcueta 중령은 나중에 그것이 아마도 고래였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 날 <산 루이스>가 Mk37 어뢰를 쏜 대상이 고래였는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어떤 영국 잠수함도 이 날 공격을 받지는 않았다.

             

<산 루이스>의 다음 기회는 5월 11일 새벽에 있었다. 5월 10일 밤, 영국해군의 21형 호위함 <얼래크러티>는 동 포클랜드와 서 포클랜드를 나누는 포클랜드 해협을 직접 통과해서 기뢰가 있는지 없는지 “몸으로 확인하라”는,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매우 위험한 임무을 맡고 포클랜드 해협의 남쪽 출구로 진입했다. <얼래크러티>는 포클랜드 해협을 고속으로 통과하다가 아르헨티나해군의 수송함 <이슬라 데 로스 에스타도스>와 마주쳐 114mm 함포로 쏴 격침시켰고, 해협을 빠져나올 무렵 같은 21형 호위함인 자매함 <애로우>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들은 영국 기동부대 본대로 복귀하기 위해 5 마일 거리를 두고 30 노트로 달렸는데, 이들의 앞에 마침 <산 루이스>가 있었다. 함장 Azcueta 중령은 <얼래크러티>를 ‘Blanco A’로, <애로우>를 ‘Blanco B’로 지정하고 SST-4 어뢰 2발을 준비했다. M8-24 화력통제장치는 여전히 고장이 나 있어 이번에도 사람이 직접 사격 제원을 산출해 쏴야만 했다. 이윽고 <얼래크러티>가 8,000 야드까지 들어온 새벽 1시 40분, Azcueta 중령은 발사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운은 그를 돕지 않았다. 첫 번째 SST-4는 발사관에서 나가질 않았고, 두 번째 SST-4는 새벽 1시 42분 표적과의 거리가 5,200 야드일 때 발사관을 떠났지만 3분 지나 유도선이 끊어졌다는 신호가 떴다. 어뢰는 <얼래크러티>를 맞추지 못하고 대신 <애로우>가 끌고 다니던 어뢰 기만기만 날려버리고 말았다. <얼래크러티>와 <애로우>는 30 노트로 달리느라 자신이 내는 소음이 너무 커서 음탐기를 전혀 쓸 수 없었고, <산 루이스>로부터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들이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나중에 <애로우>가 어뢰 기만기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이었다.

         

완벽한 공격 기회를 놓친 Azcueta 중령은 사령부에 장비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보고했고, 사령부는 별 수 없이 기지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결국 <산 루이스>는 5월 17일 기지로 돌아왔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시 출동하지 않았다. <산 루이스>의 자매함 <살타>는 <산 루이스>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아 훈련하면서 쏜 2발의 어뢰가 모두 유도 지령을 따르지 않았고 결국 <살타>는 전투에 투입되지도 못했다. <산 루이스>의 공격이 실패한 이유로 알려진 전원의 +와 -를 잘못 연결했다거나, 잠망경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전원의 +와 -를 거꾸로 연결하면 당장 단락이 일어나고 어뢰를 쏠 수조차 없게 된다. 하지만 <산 루이스>는 SST-4 2발, Mk37 1발 모두 3발의 어뢰를 제대로 쐈다. 발사된 3발의 어뢰 중에서 첫 번째 SST-4는 유도선이 끊어져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Mk37은 고래를 맞췄을 가능성이 높으며, 두 번째 SST-4는 어뢰 기만기에 속아넘어갔다. 결론적으로 전원의 +와 -를 잘못 연결했다거나, 잠망경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설은 자신들의 제품이 첫 실제 전투에서 영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둔 무기제조회사가 잘못을 아르헨티나해군에게 덮어씌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국해군 항공모함 <인빈서블>이나 상륙함에 어뢰를 쏴서 맞췄지만 모두 불발했다는 이야기 또한 거짓말이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전쟁 중에 여러 이야기를 지어냈는데 그 중에는 <Daniel Antonio Jukic> 중위가 IA-58 푸카라 공격기를 몰고 항공모함 허미즈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는 거짓말까지 있다. 사실 Jukic 중위는 5월 1일 아침 <구스 그린> 비행장에서 IA-58 푸카라를 타고 이륙을 준비하던 차에 갑자기 들이닥친 영국해군 시해리어 FRS1 3대가 던진 클러스터 폭탄을 맞고 전사했다. 

출처 : When Computers Went To Sea
글쓴이 : 백선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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