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고 산틸론 소령이 탄 선두 LVTP7은 요크 포인트의 하얀 모래를 밟고 육지로 올라왔다. 이 수륙양용 장갑차에 탄 아르헨티나 해병대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총을 밖으로 겨누었는데 엄폐물이 전혀 없는 넓은 모래밭인 이곳을 누군가 지키고 있었다면 산틸론 소령의 LVTP7은 아주 좋은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여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영국해병대가 어딘가 매복하고 있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한 채로 앞장서 나가는 산틸론 소령의 LVTP7의 무전기에 대대장 바인스타블 중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산틸론 소령의 차량을 야간투시경으로 보고 있고, 뒤따라가고 있다는 대대장의 말에 산틸론 소령은 마음이 놓였다.
산틸론 소령이 이끄는 4대의 LVTP7은 바위투성이의 울퉁불퉁한 들판을 가로질러 폭 200미터 남짓한 계곡으로 들어섰다. 산틸론 소령은 다시 한 번 영국해병대가 일부러 해안을 버리고 여기에 매복해 계곡에 들어온 적에게 사방에서 포화를 퍼붓는 <killing zone>을 만들어두고 있지나 않은지 긴장했지만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이제 날이 밝으며 밖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고 LVTP7 4대는 첫 목표인 동쪽의 비행장을 향하여 달려갔다. 뒤를 돌아본 산틸론 소령의 눈에 본대의 LVTP7들이 들어왔다. 모두 무사히 상륙한 것이다.
전차상륙함 <카보 산 안토니오>에서 발진한 20대의 LVTP7들은 단 1대의 낙오도 없이 약 3000미터의 거리를 헤엄쳐 육지로 올라왔다. 그러나 하필이면 상륙부대 사령관 뷔세르 소장이 탄 장갑차가 고장이 나 그가 탄 LVTP7은 전진 기어를 넣으면 빙빙 돌기만 했다. 결국 장갑차 조종수는 후진 기어를 넣고 쭉 뒤로만 갈수밖에 없었고 아르헨티나 침공부대의 사령관은 거꾸로 달리는 장갑차를 타고 포클랜드에 상륙했다.
비행장을 점령하는 임무를 맡은 LVTP7 4대는 전속력으로 달려 곧 비행장에 도착했다. 모두 긴장한 채로 언제든지 총을 쏠 준비를 하고 비행장으로 들어섰지만 여기에도 아무도 없었다. 다만 헌트 총독의 명령에 따라 아르헨티나군 수송기가 착륙하지 못하게 활주로에 세워둔 차량과 콘크리트 장애물이 있을 뿐이었다. 비행장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이들은 육군 25연대 본대를 태운 수송기가 착륙할 수 있도록 활주로를 막아둔 장애물을 치우기 시작했다.
영국군과의 첫 교전
뷔세르 소장이 직접 이끄는 본대는 수도 스탠리를 점령하기 위해 남쪽으로 달렸다. 비행장이 있는 반도와 스탠리를 잇는 목처럼 생긴 기다란 좁은 땅에 들어설 때 이들은 영국군이 분명히 여기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항을 예상하며 조심스럽게 전진했지만 영국군은 여기에도 없었다. 영국해병대는 겨우 70명뿐이어서 방어하기에 좋은 이곳에 조차도 배치할 병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 길목을 지나 4km 더 가서 스탠리의 바로 바깥쪽에 도달했을 때 아르헨티나군은 드디어 영국군과 맞닥뜨렸다. 이 때가 아침 7시 15분이었다.
여기에서도 앞장서 달리던 LVTP7은 산틸론 소령이 탄 차량이었다. 스탠리로 들어가는 길을 반쯤 막고 있는 도로 보수작업 차량을 본 산틸론 소령은 이것이 어쩌면 폭탄이 설치된 덫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뒤따르는 LVTP7들에게 무전기로 알렸다. 이 때 산틸론 소령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약 500미터 떨어진 하얀 집 3채 중의 하나에서 갑자기 기관총이 불을 뿜어 산틸론 소령이 탄 차량의 오른쪽에 있던 LVTP7을 정확히 맞췄다. 거의 같은 때 대전차 로켓도 날아왔지만 로켓은 한참 멀리 떨어졌다. 영국군이 쏜 기관총탄을 맞은 LVTP7은 곧바로 기관총으로 응사했고 선두 장갑차 3대에 탄 아르헨티나 해병대원들은 일제히 내려 엄폐물을 찾아 움직였다.
드디어 적과 접촉했다는 산틸론 소령의 상황 보고를 받은 대대장 바인스타블 중령이 곧바로 달려왔다. 바인스타블 중령은 여기서 산틸론 소령의 중대가 영국군에게 포화를 퍼붓는 동안 다른 2개 중대가 북쪽으로 돌아 스탠리로 돌입하도록 명령했고 106mm 무반동포로 영국군의 기관총이 있는 집에 위협사격을 하도록 했다. 불필요한 살상을 피하라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106mm 무반동포의 제1탄은 기관총탄이 날아온 집의 100미터 앞에 떨어졌다. 이어 날아간 제2탄은 그 집의 지붕을 때렸다. 곧 보라색 연막 수류탄이 터졌고 영국군의 사격이 멈추었다. 이 보라색 연막이 영국군의 철수 신호라고 판단한 바인스타블 중령의 명령에 따라 2개 중대가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지만 또 어디선가 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에 아르헨티나군은 박격포로 맞서 세발째에 다시 기관총탄이 날아왔던 집의 지붕을 맞췄다. 이제 영국군의 사격이 완전히 멈추었고 아르헨티나군은 포클랜드의 수도 스탠리로 진입했다.
영국 해병대원들은 자신들이 기관총과 대전차 로켓을 겨누고 쏜 LVTP7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아 이 LVTP7이 로켓탄에 맞아 뚫렸고 어쩌면 기관총탄도 뚫고 들어가 안에 탄 아르헨티나군 병사들을 살상했을 것이라고 믿었고 한때 영국언론은 이들이 말한 대로 보도했다. 그러나 어떤 LVTP7도 로켓탄에 맞지 않았고 다만 1대가 97발의 기관총탄을 맞아 1명이 손에 파편을 맞아 살짝 다쳤을 뿐이었다. 영국군은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철수했다.
총독 관저 점령 작전
한편 앞서 스탠리의 총독 관저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고 레이크 포인트에 상륙한 페도로 지아치노 소령의 해병 코만도 중대원 16명은 해가 뜰 무렵 총독 관저에 들키지 않고 도착했다. 지아치노 소령은 11명에게 밖에서 엄호하도록 명령하고는 자신이 직접 4명을 이끌고 관저의 뒤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들은 문을 하나 찾아 부수고 들어갔지만 그곳은 관저의 청소부가 숙소로 쓰는 별채였고 아무도 없었다. 허탕 친 지아치노 소령의 일행은 다시 나와 이번에는 본관의 뒷문을 향해 달려갔다.
지아치노 소령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때 총독 관저의 본관에는 무장한 31명의 해병대원, 11명의 해군수병, 영국해병대에서 제대한 포클랜드 주민 1명이 있었고 헌트 총독과 그의 운전사도 권총과 산탄총을 가지고 아르헨티나군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장한 44명이 기다리고 있는 본관 건물의 뒷문으로 다가가던 지아치노 소령과 그의 부하 4명에게 갑자기 총탄이 쏟아졌고 지아치노 소령과 다른 중위 1명이 쓰러졌다. 지아치노 소령은 허벅지에 맞고 동맥이 끊어져 많은 피를 흘렸고 다른 1명은 기적적으로 총탄이 그의 가슴 주머니에 있던 스위스 칼에 맞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나머지 3명은 앞서 잘못 들어갔던 별채로 숨었지만 곧 영국해병대원들에게 항복했다.
밖에서 엄호하도록 명령을 받았던 아르헨티나 해병 코만도 중대원 11명은 총소리를 듣고 총독 관저에 사격을 퍼부었지만 영국과 아르헨티나 어느 쪽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고 지아치노 소령만 허벅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한 손에 쥔 채로 총독 관저의 본관 뒤뜰에 쓰러져 있었다. 영국군은 지아치노 소령에게 응급처치를 해주려고 했지만 지아치노 소령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지아치노 소령은 결국 2시간 반이나 피 흘리며 쓰러진 채로 있게 된다.
영국군의 항복
오전 8시, 수도 스탠리는 총독 관저만 빼고 사실상 아르헨티나군에게 점령되었고 비행장에는 아르헨티나육군 25연대 병력을 태운 수송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총독 관저를 점령하려던 아르헨티나군의 첫 시도는 잘 막아냈지만 헌트 총독은 상황을 곧 깨달았다. 협상을 위해 헌트 총독은 밤새 잡혀있던 아르헨티나 국영항공사 LADE 직원 길로베르트를 불렀고 곧 아르헨티나 침공부대의 기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와 무전기로 서로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침공부대 사령관 뷔세르 소장은 총독 관저 근처에 있는 세인트 매리 성당에서 헌트 총독과 만날 것을 제안해 부하 2명을 데리고 비무장인 채로 성당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헌트 총독이 보낸 길로베르트를 만났고 지아치노 소령이 수류탄을 쥔 채로 총독 관저의 뒤뜰에 쓰러져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뷔세르 소장은 곧바로 총독 관저로 가 부하들에게 사격을 중지하도록 명령하고는 대담하게도 혼자서 총독 관저로 걸어 들어갔다.
총독 관저에 들어서자마자 한 영국 해병대원이 자동소총을 뷔세르 소장의 배에 겨누었다. 배짱이 두둑한 뷔세르 소장은 침착하게 자신을 소개하고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악수 제의에 놀란 영국 해병대원은 얼떨결에 악수를 했고 그의 뒤에 있던 다른 해병대원들도 차례로 악수를 했다. 이어 헌트 총독과 영국해병대 지휘관 누트 소령, 그의 후임으로 막 포클랜드에 도착한 노먼 소령이 나타났다. 그러나 헌트 총독만은 침략자와 악수를 할 수는 없다며 거절한다. 뷔세르 소장은 헌트 총독에게 아르헨티나군의 전력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강조한 다음 항복을 요구했지만 헌트 총독은 주저했다. 이윽고 아르헨티나군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은 것은 총독 관저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헌트 총독은 두 해병 소령의 의견을 물었다. 이들은 말없이 눈빛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항복하는 영국해병대
더 이상 저항하면 희생자만 생긴다는 것을 깨달은 헌트 총독은 결국 항복에 동의했고 이들은 곧바로 밖에서 두 시간 이상 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지아치노 소령에게 갔다. 뷔세르 소장은 지아치노 소령을 담요로 싸서 빨리 병원으로 옮기도록 하고 직접 담요의 한쪽을 잡았다. 이때 뷔세르 소장의 옆에 갑자기 다른 두 손이 나타나 담요를 잡았다. 영국해병대의 노먼 소령이었다. 얼마 전까지 서로 죽이려고 하던 적이었지만 이제 당분간 싸움을 그치기로 한 이상 생명을 구하는데 내 편 네 편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아치노 소령은 피를 너무 흘려 결국 숨졌고 사후에 중령으로 1계급 특진되었다. 지아치노 소령은 포클랜드 침공 작전의 유일한 사망자였고 아르헨티나의 최고 훈장이 주어졌다.
항복하고 몸 수색을 받고 있는 영국 해병대원
항복한 영국군과 헌트 총독 가족은 그날 저녁 비행장에서 각각 C-130 수송기와 F-28 소형 제트 여객기에 태워져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거쳐 영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런데 70명의 영국 해병대원 중의 6명은 수도 스탠리의 입구를 지키다 일단 섬의 안쪽으로 피해 저항을 계속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은 포클랜드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지리를 잘 모르고, 먹을 것도 별로 없어 오래 버틸 수가 없었고, 결국 항복하고 이들 역시 영국으로 송환되었다. 한 달 반이 지나 이 70명의 영국 해병대원 중의 상당수는 다른 5,000여명과 함께 포클랜드를 탈환하러 다시 오게 된다.
사우스 조지아 점령
스탠리로부터 남동쪽으로 800마일 떨어진 남극 근처에 있는 영국의 해외 영토 사우스 조지아 섬을 포클랜드와 함께 점령하려던 계획은 거친 날씨 때문에 이룰 수 없었고 사우스 조지아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은 제60기동부대는 하루 늦은 4월 3일 사우스 조지아 침공 작전을 시작했다. 쇄빙선 <바히아 파라이소>와 80명의 해병대원을 태운 프랑스제 A69형 초계함 <게리코>는 그리트비켄 앞바다에 나타나 무전기로 영국군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모두 합쳐 22명뿐이던 영국 해병대원들은 아르헨티나군의 알루엣 헬리콥터와 푸마 헬리콥터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린 다음 갑자기 총탄을 퍼부었고 얻어맞은 푸마 헬리콥터는 비틀거리며 산을 넘어가서는 추락했다.
이에 초계함 <게리코>가 다가와 100mm 함포를 쏘기 시작했는데 너무 가까이 들어오는 바람에 영국 해병대원들이 쏜 수백 발의 총탄과 84mm 칼구스타프, 66mm LAW 대전차 로켓탄을 얻어맞았다. 놀란 <게리코>는 소총과 대전차 로켓의 사거리 밖으로 물러난 다음 100mm 포탄을 퍼부었고 헬리콥터를 타고 상륙한 아르헨티나 해병대원들이 주위를 포위하자 그제야 영국해병대는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푸마 헬리콥터에 타고 있던 아르헨티나 해병대원 2명과 초계함 <게리코>의 수병 1명이 전사했고 영국 해병대원 1명이 다쳤다. 100mm 함포로 무장한 초계함이라는 버거운 적을 상대로 잘 싸운 다음 항복한 영국 해병대원 22명은 우루과이를 거쳐 영국으로 송환되었다.
영국의 핵추진 잠수함 파견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 의도가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사우스 조지아 섬에서 영국군과 아르헨티나군이 대치하고 있을 때 영국 정부는 아르헨티나해군의 아나야 대장이 가장 두려워하던 카드를 쓸 준비를 했다. 바로 핵추진 공격 잠수함 (SSN) 1척을 남대서양에 파견하는 것이었다. 아르헨티나 함대가 포클랜드를 향해 출동하고 하루 지난 3월 29일,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와 캐링턴 외무장관은 SSN 1척을 남대서양에 급히 보내기로 결정했고 마침 지브롤터 앞바다에서 <존 포스터 우드워드> 해군소장이 이끄는 영국해군 제1함대와 함께 훈련하고 있어 포클랜드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SSN <스파르탄>이 남대서양으로 가게 되었다. 1973년부터 취역한 <스위프트셔>급 SSN 6척 중의 1척인 <스파르탄>은 <오베론>급 디젤/전기추진 잠수함과 만나 나란히 옆에 댄 다음 실제 전투에 쓸 탄두가 달린 어뢰를 넘겨 받고는 남대서양으로 떠났다. 이 SSN이 포클랜드까지 가는 데는 약 10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스코틀랜드의 파슬레인 잠수함 기지를 떠나는 스파르탄
그런데 곧 영국 정보부가 아르헨티나군의 무선 통신을 엿듣고 아르헨티나의 침공 의도를 확실히 파악하자 영국의 북쪽 지방 스코틀랜드의 파슬레인에 위치한 영국해군 잠수함 기지에 비상이 걸렸다. 4월 1일, <스파르탄>의 자매함이자 1년 전에 취역한 가장 새로운 SSN인 <스플렌디드>가 포클랜드를 향해 출동했고 4월 4일에는 1971년에 취역한 비교적 오래된 <밸리언트>급 SSN인 <콩커러>가 출동했다. 여기서 핵추진 잠수함과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이 포클랜드까지 가는데 걸린 시간을 비교해 보면 둘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흔히 SSK라고 줄여 쓰는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은 깊이 잠수하면 배터리로만 움직일 수 있고, 배터리를 충전할 때는 물 위로 올라오거나 공기 흡입/배출 파이프만 물 위로 내놓고 달려야만 한다. 이와 달리 원자로에서 나오는 무한에 가까운 에너지로 달리는 SSN은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물 위로 올라오거나 공기 흡입/배출 파이프를 올릴 필요가 없고, 계속해서 30노트 남짓한 최고 속력으로 달릴 수도 있다.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은 최고 속력이 20노트를 넘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또 최고 속력을 내면 몇 시간 안에 배터리에 저장된 전기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만다. 이런 이유 때문에 SSN은 대양을 급히 건너야만 하는 전략적 기동력에서 SSK에 대해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스파르탄>이 세운 기록으로 금방 알 수 있다. <스파르탄>은 4월 1일 떠나 4월 11일 영국 정부가 선포한 포클랜드 주변의 해상 봉쇄 구역 MEZ의 바깥쪽에 도착했다. 반면 <오베론>급 SSK 중의 1척인 <오닉스>는 4월 26일 영국을 떠나 거의 한달 만에 8,000마일을 내려가 5월 28일 포클랜드 해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오닉스>는 8,000마일 여정의 약 반을 물 위로 부상한 채로 달려 누군가 해상초계기를 보냈더라면 금방 탐지될 수도 있었다.
영국 SSN의 보이지 않는 무력 시위
사실 1976년 아르헨티나군이 남극 근처에 있는 영국의 해외 영토인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의 <Southern Thule>을 무단 점거하고 이듬해 1977년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외교 관계가 점차 나빠지고 있을 때 영국 외무장관 <데이빗 오언>은 12월에 있을 협상에 앞서 아르헨티나를 압박할 카드로서 SSN 1척을 보내자고 주장한 바 있었다. 당시 영국 총리 <제임스 캘러헌>은 이 주장을 받아들여 1963년 취역한 영국의 첫 SSN인 <드레드노트>가 1977년 12월 남대서양으로 파견되었다. <드레드노트>는 협상이 잘 풀리지 않아 아르헨티나가 무력 시위를 하게 되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도록 명령을 받았고, <드레드노트>에게 영국 정부의 지령을 전달하는 통신 중계소 역할을 하기 위해 호위함 2척이 함께 남대서양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호위함 2척이 포클랜드 주변에서 발견되면 아르헨티나를 너무 자극할 것으로 우려되어 이들은 포클랜드에서 1,000 마일 이상 떨어져 있고, 물 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 <드레드노트>만 포클랜드 근처에서 대기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다행히 이 때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협상은 잘 풀려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고 <드레드노트>와 호위함 2척은 조용히 철수했다. 협상이 진행될 때 영국 SSN이 포클랜드 주변 바닷속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르헨티나 측이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SSN은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 곧바로 꺼내 쓸 수 있는 <조커>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영국해군 기동부대의 출동
생각지도 못한 때와 장소에서 2,000여명의 자국민이 갑자기 외국의 군사 독재 정부의 지배에 놓이게 된 이 사태는 영국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아르헨티나 국기를 휘날리며 기뻐하는 아르헨티나 군중들의 모습과 영국 해병대원들이 무기를 놓고 항복하는 굴욕적인 장면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타나자 영국 국민들에겐 “어떻게 이럴 수가…”란 무력감이 들었고 이 무력감은 차차 분노로 바뀌었다. 국민들은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랐지만 영국 정부는 아르헨티나군이 침공하면 포클랜드의 얼마 되지 않는 수비대가 오래 못 버티고 항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의 침공 의도가 드러난 3월 31일, 영국의 해군제1卿 (First Sea Lord - 우리나라의 해군참모총장과 비슷한 직책) <헨리 리치> 해군대장은 오라는 부름을 받지 않았지만 하원 의사당의 총리실로 마거릿 대처 총리를 직접 찾아가 균형 잡힌 기동부대를 곧바로 남대서양으로 보낼 수 있고,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침공해 점령하더라도 이 기동부대가 포클랜드를 탈환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영국의 첫 여성 총리여서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 정부의 장군들에게는 유약하게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대처 총리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용기 있는 결단을 내렸다. 영국해군의 거의 모든 주요 함정으로 이루어진 기동부대가 출동하게 된 것이다. 비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국방장관 <존 노트>는 자신감에 찬 리치 해군대장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못했고, 리치 해군대장은 대처 총리에게 감사를 표시하고는 곧바로 총리실을 떠났다. 대처 총리의 신속한 결단을 이끌어낸 배짱 두둑한 리치 해군대장은 1941년 12월 말레이 반도 앞바다에서 일본해군 육상공격기들의 어뢰와 폭탄을 맞고 격침된 영국전함 <프린스 어브 웨일즈>의 함장 <존 리치> 해군대령의 아들이었고, 불과 스무 살이던 1943년 12월 영국전함 <듀크 어브 요크>가 독일전함 <샤른호르스트>를 북극해에서 격침시킬 때 14인치 포탄을 열심히 장전하던 경력을 가지고 있는 해군인이었다.
1982년 영국해군의 전력
1982년 4월 영국해군은 주요 함정으로 폴라리스 미사일 16발로 무장하는 핵추진 전략 핵 미사일 잠수함 (SSBN) 4척, 핵추진 공격 잠수함 (SSN) 11척, 시해리어 수직이착륙 전폭기를 운용하는 경항공모함 2척, 뒤에 상륙정이 드나드는 <well dock>이 있는 도크형 상륙함 (LPD) 2척을 가지고 있었다. 함대의 일꾼인 구축함 및 호위함으로는 시다트 미사일로 무장하고 링스 헬리콥터 1대를 싣는 42형 구역방공 구축함 8척, 시울프 미사일로 무장하고 링스 헬리콥터 2대를 싣는 22형 호위함 3척을 포함하여 모두 65척이 있었다. 미국, 소련에 이어 세계 3위에 해당하는 막강한 전력이었는데 불과 4년 전인 1978년까지는 F-4K 팬텀 II 전폭기와 버커니어 공격기, 개닛 조기경보기를 탑재하고 만재배수량이 50,000톤을 넘어가는 본격적인 공격 항공모함 (CVA) <아크 로열>이 있었고 10년 전인 1972년에는 <아크 로열>뿐만 아니라 자매함 <이글>도 가지고 있었다.
포클랜드전쟁에 10년 앞서 퇴역한 공격 항공모함 이글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영국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마치 지금의 미국처럼 동남아시아와 중동의 안보를 책임지고 인도양에 항상 공격 항공모함을 최소한 1척 두고 있었고 싱가포르에는 영국 극동함대의 사령부가 있었다. 이를 위해 영국해군은 50,000톤이 넘는 공격 항공모함 <이글>, <아크 로열>, 35,000톤이 넘는 <빅토리어스>, 30,000톤에 약간 못 미치는 <허미즈>, <센토>를 가지고 있었고, 해병대원을 태울 헬리콥터를 다수 탑재하는 헬리콥터 모함 (LPH) <앨비언>, <불워크>, LPD <피어리스>, <인트레피드>가 있었다. CVA 5척, LPH 2척, LPD 2척의 전력은 1960년대의 동남아시아와 중동에서 대부분의 나라의 저항을 물리치고 상륙작전을 감행하기에 충분했지만 1966년 2월 영국 정부는 새로운 50,000톤급 공격 항공모함 CVA-01의 건조를 취소하고 이미 있는 공격 항공모함들은 1970년대에 모두 없애겠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그 이유는 싱가포르와 인도양의 여러 섬에 배치할 미국제 F-111 장거리 공격기 50대가 공격 항공모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고, 영국이 앞으로 어떠한 동맹국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상륙작전을 벌일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년 지나 1968년 1월 영국 정부는 돈이 없어 더 이상 동남아시아와 중동에서 경찰 노릇을 못하겠다고 선언을 했고, F-111의 구매 또한 취소되었다. 공격 항공모함들을 퇴역시키기로 한 결정은 변함이 없었고, 영국이 앞으로 어떠한 동맹국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상륙작전을 벌일 일은 없을 것이니 공격 항공모함이 없어도 된다는 1966년 영국 국방장관 <데니스 힐리>의 단언은 16년 지나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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