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해외영토 사우스 조지아 섬에 무허가 상륙한 아르헨티나 인부들이 스스로 떠나지 않으면 모두 잡아가겠다고 영국 정부가 통보한 3월 23일, 아르헨티나 군부는 이 인부를 지킬 무장병력 14명을 태운 수송한 <바히아 파라이소>를 사우스 조지아로 보내면서 미리 세우고 있던 침공 계획을 얼마나 앞당길 수 있는지 파악해 보고하도록 관련 부대에 명령했다. 이틀 지나 올라온 보고는 4월 1일에 포클랜드와 사우스 조지아에 침공할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28일에 출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아르헨티나 군부는 곧바로 침공을 실행하도록 명령했고 25일부터 갑작스러운 침공 준비가 시작되었다.
아르헨티나해군이 세운 포클랜드 침공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전차상륙함 <카보 산 안토니오>, 방공구축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헤르쿨레스>, 초계함 <드럼몬드>, <그랑빌>, 잠수함 <산타 페>, 쇄빙선 <알미란테 이리자>, 수송함 <이슬라 데 에스타도스>로 이루어진 제40기동부대가 포클랜드 침공병력을 싣고 가서 이들을 기습 상륙시킨다. 침공병력은 387명의 해병 2대대를 주축으로 하여 모두 904명으로 이루어졌고 여기에는 육군도 이 작전에 참가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육군 25연대의 1개 소대 39명이 포함되었다. 이들이 쓸 중장비로는 LVTP7 수륙양용장갑차 20대, LARC5 수륙양용트럭 5대, 105mm 야포 6문이 있었다. 제40기동부대의 사령관은 <알라라> 해군소장, 상륙부대의 사령관은 <카를로스 뷔세르> 해군소장이 맡았다.
사실 제40기동부대와 여기에 탄 904명의 병력은 포클랜드를 침공하여 점령하는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해군은 최대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아르헨티나해군 유일의 항공모함인 <베인티싱코 데 마요>를 주축으로 하고 4척의 구축함과 1척의 군수 지원함을 포함하는 제20기동부대도 출동시켜 제40기동부대를 엄호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때 남대서양에 있던 영국군함이라곤 20mm 기관포 2문과 조그만 워스프 HAS1 헬리콥터를 2대 실을 뿐인 쇄빙선 <엔듀런스>가 유일했으니 파리 잡는데 망치를 휘두른 셈이었다.
이밖에 사우스 조지아도 함께 점령하기 위해서 제60기동부대가 편성되었다. 여기에는 이미 사우스 조지아에 14명의 무장병력을 싣고 가서 상륙시킨 쇄빙선 <바히아 파라이소>가 있었고 80명의 병력을 태운 초계함 <게리코>가 새로 추가되었다. 원래 아나야 해군대장은 제40기동부대에 포함된 초계함 <드럼몬드>, <그랑빌>도 사우스 조지아로 가도록 무선통신으로 명령을 내렸는데 롬바르도 해군중장이 반대하여 이들은 제40기동부대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나야의 명령은 무선감청을 통해 알고 있었지만 롬바르도가 반대한 것은 몰라 이 2척이 사우스 조지아로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
아르헨티나해군의 전력
여기서 1982년의 아르헨티나해군의 주요 전력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잠수함 (SSK) |
2척 |
살타 산 루이스 |
1974년 건조 1974년 건조 |
1,300톤 |
독일제 209형 잠수함 SST-4, Mk37 어뢰 14발 |
초계잠수함 (SS) |
1척 |
산타 페 |
1945년 건조 1971년 구입 |
2,400톤 |
미국제 GUPPY형 잠수함 (중고) |
경항공모함 (CVL) |
1척 |
베인티싱코 데 마요 |
1945년 건조 1968년 구입 |
20,000톤 |
영국제 콜로서스급 경항모 (중고) A-4 스카이호크 공격기 S-2 트랙커 대잠초계기 S-61 시킹 대잠헬리콥터 등 합계 약 20대 탑재 |
경순양함 (CL) |
1척 |
헤네랄 벨그라노 |
1938년 건조 1951년 구입 |
12,000톤 |
미국제 브루클린급 경순양함 (중고) 6인치포 15문 |
방공구축함 (DDG) |
2척 |
헤르쿨레스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
1976년 건조 |
4,100톤 |
영국제 42형 방공구축함 시다트 구역방공 미사일 22발 |
구축함 (DD) |
1척 |
코모도로 파이 |
1945년 건조 |
3,500톤 |
미국제 기어링급 구축함 (중고) MM38 엑조세 함대함 미사일 4발 |
구축함 (DD) |
3척 |
코모도로 세구이 피에드라 부에나 히폴리토 부샤르 |
1944년 건조 1944년 건조 1944년 건조 |
2,200톤 |
미국제 섬너급 구축함 (중고) MM38 엑조세 함대함 미사일 4발 |
초계함 (PCG) |
3척 |
드럼몬드 그랑빌 게리코 |
1978년 건조 1978년 건조 1978년 건조 |
1,300톤 |
프랑스제 A69형 초계함 MM38 엑조세 함대함 미사일 4발 |
전차상륙함 (LST) |
1척 |
카보 산 안토니오 |
1976년 건조 |
7,800톤 |
미국 LST 설계 참고하여 국내 건조 |
아르헨티나해군은 제1차세계대전 이전 미국에서 12인치포로 무장한 <리비다비아>급 전함 2척을 사들이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영국에서 사들인 <콜로서스>급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치아>에서 미국제 F4U 코르세어 전폭기를 운용하여 비록 함정의 숫자는 적지만 강대국의 앞선 해군을 따르려 노력했고, 1982년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인도, 브라질, 스페인,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전세계에 아홉 개뿐이었던 항공모함 보유국의 하나였으며 구역방공 미사일로 무장한 방공구축함도 2척 가지고 있었다.
1958년 영국에서 구입한 영국제 콜로서스급 경항공모함 <인디펜던치아>의 1963년 모습. 1970년까지 F4U 코르세어를 운용.
1951년 미국에서 구입해 네덜란드제 전자장비를 달아 개량한 경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
적을 무장시킨 영국
그런데 공교롭게도 아르헨티나의 항공모함과 방공구축함을 만들어준 나라는 다름아닌 영국이었다. 만재배수량 약 20,000톤이고 <5월 25일>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는 원래 1945년 영국에서 건조된 <콜로서스>급 항공모함 <베너러블>이었고 이 배는 영국해군에는 딱 2년만 있다가 1948년 네덜란드해군에게 팔려 <카렐 두어만>이 되었다. 네덜란드해군은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이 배를 완전히 뜯어고쳐 최신형 경항공모함으로 탈바꿈시켰고 <카렐 두어만>은 그로부터 10년간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의 대잠수함전 항공모함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1968년 보일러에서 불이나 당분간 못쓰게 되자 마침 항공모함을 없애고 프랑스제 아틀란틱 1 해상초계기 9대로 항공모함의 역할을 대체하려고 하던 네덜란드 정부는 그 해 10월 15일 <카렐 두어만>을 아르헨티나에 팔아 치웠다.
1968년 네덜란드에서 구입한 영국제 콜로서스급 경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의 1981년 모습. 비행갑판의 함재기는 A-4 스카이호크 11대, S-2 트랙커 4대, S-61 시킹 3대.
그리하여 주인이 또 바뀐 이 배는 이듬해 1969년 3월 12일 <베인티싱코 데 마요>란 이름을 달고 아르헨티나해군에 취역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해군은 앞서 1958년에 영국으로부터 사들인 같은 <콜로서스>급 <인디펜던치아>까지 모두 2척의 항공모함을 가지게 되었고, 1969년 9월에는 영국의 항공기 제작사 <호커 시들리>가 해리어 수직이착륙 전폭기를 팔기 위해 영국공군의 해리어 GR1을 1대 빌려와 <베인티싱코 데 마요>에서 시범까지 했다. 만약 이 때 아르헨티나해군이 해리어까지 샀더라면 포클랜드에서 두 나라가 같은 전폭기를 가지고 싸울뻔한 것이다.
아르헨티나해군의 방공구축함 <헤르쿨레스>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시다트 구역방공 미사일로 무장한 영국해군의 42형 방공구축함과 같은 배였다. 이 2척은 1970년에 도입하기로 결정되었고 <헤르쿨레스>는 영국의 조선소에서 건조되어 1977년 아르헨티나해군에 취역했다. <헤르쿨레스>의 자매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1973년부터 아르헨티나의 조선소에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7년 지나서 1980년에야 취역했다. <헤르쿨레스>와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전자장비와 무장이 영국해군의 42형 방공구축함과 똑같아 나중에 아르헨티나 해군항공대와 공군에게 좋은 훈련 상대가 되어준다.
1976년 영국에서 완성되어 1977년 아르헨티나해군에 취역한 42형 방공구축함 <헤르쿨레스>. 전쟁이 끝나고 영국의 무기금수조치 때문에 시다트 미사일을 유지할 수 없어 지금은 수송함으로 쓰인다.
침공부대의 출동
침공작전을 실행하도록 명령 받은 아르헨티나군의 각 부대는 금요일 26일과 토요일 27일 쉴 새 없이 준비해 28일 일요일 아침 8시부터 타고 갈 함정에 오르기 시작했다. 언론에는 아르헨티나해군이 이웃의 우루과이해군과 함께 훈련하기 위해 출항한다고 발표되었고 해병대원들에게는 남쪽의 파타고니아에 훈련을 하러 가는 것이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이전의 훈련과 달리 너무나 많은 실탄이 실리고 사우스 조지아에서 영국과 마찰이 있다는 언론 보도가 전해지자 일부는 눈치를 채기 시작했고 이들은 각자의 짐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구해 집어넣었다.
3월 28일 정오, 모든 준비를 마친 제40기동부대는 <푸에르토 벨그라노> 해군기지를 떠나 포클랜드를 향해 출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심 식사 시간에 훈련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포클랜드를 침공하러 간다는 사실이 장교들에게 공지되었고 작전 계획 또한 설명되었다. 작전 계획은 진짜 파타고니아로 훈련하러 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남쪽으로 크게 돌아 남쪽으로부터 포클랜드에 접근해 4월 1일에 기습 상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29일 월요일부터 강한 폭풍이 불기 시작했다. 정원이 450명이지만 거의 2배인 880명이나 태운 전차상륙함 <카보 산 안토니오>는 해안에 배를 들이대기 위해서 배 밑바닥이 평평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장 심하게 흔들렸고 때로는 무려 44도까지 옆으로 기울었다. 침공부대원들은 모두 뱃멀미로 고생했고 배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실려있던 푸마 헬리콥터들은 서로 부딪혀 부서지고 말았다.
31일 수요일, 폭풍 때문에 계획대로 4월 1일에 남쪽으로부터 포클랜드에 접근해 상륙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 깨닫기 시작했고 제40기동부대의 기함인 42형 방공구축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에 함께 타고 있던 침공부대의 총사령관 <오스발도 가르시아> 육군대장과 제40기동부대 사령관 알라라 해군소장은 하루 늦춰 4월 2일 상륙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다음날 4월 1일, 폭풍은 이제 멈추었지만 아르헨티나 본국으로부터 새로운 정보가 침공부대에게 전달되었다. 영국이 눈치를 챘다는 소식이었다.
드러난 침공 의도
침투요원을 포클랜드에 상륙시켜 해안을 정찰하라고 잠수함 <산타 페>에게 전달된 명령을 영국 정보부가 엿듣고는 즉각 포클랜드의 헌트 총독에게 알렸고, 헌트 총독은 아르헨티나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곧바로 주민들에게 방송으로 널리 알리고 스탠리 비행장에 아르헨티나 수송기가 착륙하지 못하게 막아 놓도록 명령했다. 마침 연간 교대 병력이 와서 평소보다 거의 2배인 70명이 있던 영국 해병대는 수도 스탠리 주변의 네 곳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스탠리에 이미 정보원을 심어 두고 있어 영국의 대응 조치를 모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스탠리 비행장에는 수익성이 없어 민간항공사가 취항하지 않는 노선을 맡는 LADE라는 아르헨티나 국영 항공사가 취항하고 있었는데 LADE는 아르헨티나공군에 속하는 조직이었고 LADE의 스탠리 주재원 <헥토르 길로베르트>가 바로 이 정보원이었다.
이제 영국이 눈치챘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상륙부대 사령관 뷔세르 해군소장은 작전 계획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상륙 위치는 원래보다 좀 더 서쪽인 <요크 베이>로 바뀌었고 본토에서 날아온 공군 수송기가 스탠리 비행장에 착륙하는 것은 취소되었다. 수도 스탠리의 총독 관저를 점령할 부대는 육군 25연대의 1개 소대에서 <페도로 지아치노> 소령이 이끄는 해병대의 코만도 중대로 바뀌었는데 지아치노 소령은 원래 이 임무에 맞춰 훈련을 한 육군 부대가 다른 배에 타고 있어 이들의 조언을 듣지 못한 채로 총독 관저 점령 작전을 맡게 되었다. 이 갑작스러운 임무 변경은 다음날 아르헨티나군의 유일한 전사자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4월 1일 오후 6시 30분, 침투요원을 실은 잠수함 <산타 페>가 물 속으로 잠수하면서 외부와의 통신이 끊어졌고 작전을 중지하라는 명령은 이 때까지 본국으로부터 오지 않았다. 이제 포클랜드 침공은 되돌릴 수 없는 기정 사실이 되었고 30분이 지난 오후 7시, 뷔세르 해군소장은 방송 마이크를 잡고 <카보 산 안토니오>에 탄 모든 이에게 내일 포클랜드에 상륙한다고 발표했다. 곧바로 마치 아르헨티나가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처럼 모두들 함성을 지르며 기뻐 날뛰었다. 포클랜드 주민들에게는 침략이지만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염원하던 <말비나스 수복>이 다가온 것이다.
영국 정부는 다음날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에 침공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는 급히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에게 아르헨티나의 갈티에리 대통령을 말려달라고 요청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즉시 갈티에리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갈티에리는 받으려 하지 않았고, 레이건이 끈질기게 요구하자 밤 10시에 결국 전화를 받기는 했다. 그러나 갈티에리는 물 속으로 들어간 잠수함 <산타 페>에게 작전 취소 명령을 내릴래야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버티었고 사실 취소할 생각도 없었다. 포클랜드를 침공해 점령하는 아르헨티나의 <Azul 작전>은 이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지게 되었다.
침공 개시!
레이건과 갈티에리가 통화하기 30분 전인 4월 1일 밤 9시 30분, 42형 방공구축함 <산티시마 트리니다드>는 스탠리의 남동쪽 해안으로부터 1.6km 떨어진 곳에 닻을 내렸다. 21척의 고무 보트가 바다로 내려져 해병 코만도 중대원들이 나눠 타기 시작했고 1시간 반이 지나 모든 준비가 끝났다. 곧 이 보트들은 앞장 선 <베르나르드 슈바이처> 중위의 보트를 따라 목표 상륙 지점인 <멀 크릭>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거의 모든 상륙작전에서 볼 수 있는 실수가 여기서도 벌어졌다. 방향을 너무 위쪽으로 잡아 <멀 크릭>이 아니라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만 것이다. 이 보트들은 원래 예정 진로보다 북쪽으로 치우쳐 가다가 프로펠러가 이곳에 많이 나는 "kelp"라고 불리는 해초에 걸려버렸다. 켈프는 포클랜드 해안에 많이 나고 포클랜드 주민들의 별명인 <kelper>는 여기서 따 온 것이다. 해병 코만도 중대원들은 노를 저어서라도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너무나 느렸고, 모두 켈프를 헤치고 나오긴 했지만 결국은 <멀 크릭>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해안에 상륙할 수 밖에 없었다. 밤 11시, 아르헨티나 해병 코만도 중대원 92명은 스탠리 남쪽에 있는 <레이크 포인트>의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 발을 디뎠다.
아르헨티나 해병대 코만도 92명이 고무 보트를 타고 상륙한 위치와 이동 경로
그러나 앞서 이들이 탄 보트의 프로펠러가 켈프에 걸려 헛돌고 있을 때 보트의 엔진 소리를 한 영국 해병대원이 들었고 이것은 곧바로 상부에 보고되었다. <레이크 포인트>에 상륙한 92명 중에서 스탠리의 총독 관저를 점령할 임무를 맡은 지아치노 소령이 이끄는 16명은 북쪽으로 4km 떨어진 총독 관저를 향해 떠났고, 10km 떨어진 <무디 브룩>에 있는 영국 해병대 막사를 공격할 임무를 맡은 <산체스 사바로츠> 소령이 이끄는 나머지 병력은 먼저 바닷가를 따라 원래의 목표 상륙 지점이었던 <멀 크릭>으로 간 다음 양떼 목장의 펜스를 따라 <무디 브룩>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정찰 사진에서는 풀밭으로 보였던 땅이 실제로 와서 보니 온통 바위투성이의 험한 땅이어서 10km를 가는데 무려 6시간 이상이 걸려 이들은 4월 2일 새벽 5시 30분에야 <무디 브룩>에 도착했다. 아르헨티나 해병 코만도들은 방 하나에만 불이 켜진 <무디 브룩>의 영국 해병대 막사의 사방에 기관총을 둘러 싸 배치한 다음 최루탄을 던져 넣었다. 되도록 사상자를 내지 않고 생포하기 위해서였는데 막사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영국 해병대원들이 모두 다른 곳에 가 있고 막사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작전 계획대로 같은 시각에 지아치노 소령이 이끄는 16명이 총독 관저를 공격할 때 영국 수비대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 막사 위로 예광탄을 쏴댔고 이 불꽃놀이와 기관총 소리에 곧 스탠리의 불빛이 모두 꺼졌다.
1958년의 미국 LST-1171 <데 소토 카운티>급 전차상륙함 설계를 들여와 1976년 아르헨티나 국내에서 건조한 <카보 산 안토니오>
<무디 브룩>의 영국 해병대 막사의 공격을 맡은 부대가 고생하며 험한 땅을 가로질러 이동하고 있던 새벽 4시, 잠수함 <산타 페>를 타고 간 또 다른 아르헨티나 해병 코만도 부대원들이 스탠리 비행장이 있는 반도의 북쪽 바닷가에 상륙했다. 이들의 임무는 <카보 산 안토니오>에서 발진할 20대의 LVTP7 수륙양용장갑차를 타고 올 해병 2대대를 올바른 상륙 지점으로 유도하는 것이었다. 새벽 6시에 조금 못 미친 시각, <카보 산 안토니오>는 초계함 <드럼몬드>의 호위를 받으며 바닷가로부터 3.2km 떨어진 LVTP7 수륙양용장갑차의 발진 위치로 들어왔다. 이 2척은 아르헨티나군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경고를 받고 레이더로 해상을 탐색하던 화물선 <포레스트>의 레이더에 잡혔지만 뷔세르 해군소장은 레이더에 잡히더라도 영국 측이 아르헨티나군의 전력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오히려 영국 측의 사기가 꺾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작전을 이렇게 짰다. 곧 새벽 6시 정각, <카보 산 안토니오>의 뱃머리가 열리고 아르헨티나 해병 2대대 병력을 태운 20대의 LVTP7 수륙양용장갑차와 1대의 LARC5 수륙양용트럭이 차례로 30초마다 1대씩 발진했다. LVTP7 1대에는 상륙부대 사령관 뷔세르 해군소장이 타고 있었고 첫 실제 전투여서 모두들 흥분해 있었다. 장갑차들은 <카보 산 안토니오>의 레이다의 유도를 받으며 물 위로 튀어나온 바위들을 피해 안전하게 <요크 포인트>를 향해 나아갔고 그 다음부터는 잠수함 <산타 페>로부터 미리 상륙한 정찰대가 설치한 붉은 랜턴이 있는 목표 상륙 지점으로 돌진했다. 6시 30분, 첫 LVTP7이 육지로 올라왔다. LVTP7의 트랙이 땅에 닿자 지휘관 <휴고 산틸론> 소령의 "모두 일어서!"란 명령에 해치가 일제히 열렸고 아르헨티나 해병대원들은 각자 개인화기를 밖으로 겨누었다.
아르헨티나 해병 2대대가 LVTP7을 타고 상륙한 위치와 이동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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