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어떠한 동맹국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상륙작전은 벌일 일이 없다고 데니스 힐리 국방장관이 단언하고 16년이 지나서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결코 얕볼 수 없는 적을 상대로 홀로 싸우게 된 영국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국제사회의 여론을 영국 쪽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02호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를 침공하기 하루 전 날인 4월 1일, UN주재 영국대사 <앤소니 파슨스>卿은 UN 안전보장이사회의 15개국에게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의도를 급히 알리며 아르헨티나와의 외교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긴급 회의를 소집하자는 파슨스 대사의 제안은 뜻밖의 반대를 받았다. 반대를 한 장본인은 놀랍게도 영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미국의 <진 커크패트릭> UN 대사였다. 뼛속까지 반공주의자인 커크패트릭 대사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침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긴급 회의 소집을 자신이 막겠다고 경고했는데, 그녀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영국 편을 들어서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이 반미로 돌아서고, 이틈을 소련이 노리는 것을 걱정했다. 이에 파슨스 대사는 지지 않고 커크패트릭 대사가 긴급 회의 소집을 막으려 들면 절차대로 안건을 투표에 부쳐서 TV 카메라 앞에서 커크패트릭 대사를 다수결로 꺾어 망신을 주겠다고 맞섰다. 결국 커크패트릭 대사는 물러섰고, 다음날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를 침공해 점령하자 파슨스 대사가 쓴 결의안 502호가 UN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되었다. 결의안 502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1982년 4월 2일의 아르헨티나군 침공 소식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포클랜드 (말비나스) 지역에서 평화가 침해되었음을 확인하면서 1. 적대 행위의 즉시 중지를 요구하고 2. 포클랜드(말비나스)에서 모든 아르헨티나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하며 3. 아르헨티나와 영국 정부에게 상호 견해 차이에 대한 외교적인 해결방안을 찾고 UN 헌장을 존중하도록 요구한다.”
아르헨티나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아르헨티나군의 즉시 철수를 요구하는 이 결의안 502호는 4월 3일 저녁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투표에 부쳐졌다. 결과는 15개국 중에서 파나마만 반대하고 소련, 폴란드, 중국, 스페인은 기권하며 미국을 포함한 10개국은 찬성하는 영국의 외교적 대승리였다. 포클랜드를 기습 침공해 점령하고 UN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아 포클랜드 점령을 기정사실로 만들려던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라틴 아메리카의 딱 한 나라만 빼고 거의 모든 다른 나라들로부터 비난을 받자 크게 당황했다. 예상과 달리 국제 여론이 영국의 편을 들고, 게다가 영국은 포클랜드를 되찾기 위해 기동부대를 보내겠다고 나와 침공 이전에 세운 가정이 모두 틀려버리고 만 것이다.
결의안 502호가 투표에 부쳐지기 전, 영국은 되도록 많은 찬성표를 받기 위해 외교력을 총동원했다. 15개국 중의 하나인 요르단이 기권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파슨스 대사는 결의안을 다시 프린트해서 오겠다며 시간을 끌었고, 그 사이 마거릿 대처 총리가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에게 전화를 걸어 결의안에 찬성해 달라고 설득했다. 요르단의 찬성표는 이렇게 해서 얻어냈고, 영국으로부터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프랑스가 프랑스 말을 쓰는 아프리카 국가인 자이르와 토고를 설득해 이들도 영국 지지로 돌아섰다. 미국에는 커크패트릭 대사처럼 아르헨티나 편을 드는 의견도 있었지만 역시 가장 가까운 동맹국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기동부대의 출동
포클랜드가 점령되고 하루 지난 4월 3일, 영국 국방부는 포클랜드를 되찾기 위한 작전을 “단결”이라는 뜻인 “Operation Corporate”라고 이름 짓고, 해군의 작전사령관 <존 필드하우스> 해군대장에게 이 작전에 투입될 함정들을 통보했다. 이 함정들에 대한 첫 번째 명령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되도록 빨리 남대서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사실 이에 앞서 아르헨티나의 침공 의도가 드러난 3월 31일에 항공모함 <허미즈>, 항공모함 <인빈서블>, 도크형 상륙함 <피어리스>, 4척의 구축함/호위함, 2척의 상륙함과 해병 3개 대대, 그리고 3코맨도여단 본부가 남대서양으로 보낼 함정과 부대로 이미 꼽혀 있었고 4월 1일에는 핵추진 공격잠수함 (SSN) <스파르탄>과 <스플렌디드>가 남대서양으로 출동했다.
SSN의 출동과 기동부대의 출동 준비는 결국 4월 2일 아르헨티나의 침공을 막지는 못했다. 다시 말해 전쟁 억지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 덕분에 일단 기동부대를 보내기로 결정이 나자 일은 아주 빨리 진행되었다. 4월 2일 0227시, 작전사령관 필드하우스 해군대장은 <허미즈>, <인빈서블>, <피어리스>, 21형 호위함 <얼래크러티>와 <앤틸로프>, 그리고 군수지원함 <리소스>에 명령을 받으면 4시간 안에 남대서양으로 출동할 수 있도록 하라는 준비 명령을 내렸다. 13분이 지난 0240시, 지브롤터 앞바다에서 "스프링트레인" 훈련을 지휘하고 있던 1함대의 <존 포스터 "샌디"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1함대를 이끌고 즉시 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영국의 해외 영토인 <아센션> 섬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때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길목에 있는 영국 영토인 지브롤터에는 시슬러그 구역방공 미사일로 무장한 “카운티”형 방공구축함 <앤트림>과 <글래모건>, 시다트 구역방공 미사일로 무장한 42형 방공구축함 <글래스고>, <코벤트리>, 영국해군의 가장 새로운 자함방공 미사일인 시울프로 무장한 22형 호위함 <브로드소드>, <브릴리언트>, <배틀액스>, 21형 호위함 <애로우>, <액티브>, 그리고 “리앤더”형 호위함 <갤러티어>, <유리앨러스>, <오로라>, <다이도>, <애리애드니>, 12M형 호위함 <로우스토프트>, <릴>, <플리머스>, <야무스>가 있었고, 여기에 더해 해군 수병이 아니라 민간인이 타는 보조선대 Royal Fleet Auxiliary, RFA의 군수지원함 <타이드스프링>, <인가딘>, <애플리프>가 있었다.
이 중에서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앤트림>, <글래모건>, <글래스고>, <코벤트리>, <브릴리언트>, <애로우>, <플리머스>와 군수지원함 <타이드스프링>을 이끌고 연료를 아끼며 천천히 아센션 섬으로 가게 되었고, 원래 영국해군의 페르시아 만 초계 작전인 “아밀라 패트롤”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가던 42형 구축함 <쉐필드>도 합류했다. 3월 29일에 지브롤터를 떠나 훈련 중이던 우드워드 해군소장의 1함대는 명령을 받자마자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는데, 그 이유는 “함대가 이미 남대서양으로 출동했다는 인상을 주어야만 하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귀관은 지브롤터에 들르지 말고 곧바로 가야 한다”는 필드하우스 작전사령관의 명령 때문이었다.
군함의 다용도성과 가동률
구축함과 호위함이 18척이나 지브롤터에 있었지만 일단 여기에 있던 7척과 페르시아 만에서 임무를 마치고 온 1척을 합친 8척만 가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다용도성과 가동률이었다. 먼저 “리앤더”형 호위함 4척은 원래 있던 114mm 연장 포탑을 없애고 그 자리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개발한 아이카라 대잠수함 미사일 발사기를 달아서 포클랜드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 중의 하나인 함포 사격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소련의 핵추진 잠수함을 잡는 임무 말고는 달리 쓸 곳이 없는, 너무 전문화된 군함이어서 이들은 기동부대에서 제외되었다. 22형 호위함들도 함포가 없었지만 대신 이들은 도플러 효과를 이용해서 육지에서 반사되는 신호를 없앨 수 있는 새로운 967/968형 펄스-도플러 레이더를 가지고 있었고, 완전자동으로 신속한 발사가 가능한 최신형 시울프 자함방공 미사일도 있으며, 링스 HAS2 헬리콥터를 2대씩 실을 수 있어서 기동부대에 꼭 필요했다. 그러나 지브롤터에 있던 <브로드소드>, <브릴리언트>, <배틀액스> 중에서 <브로드소드>는 12M형 호위함 <야무스>와 함께 “아밀라 패트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페르시아 만으로 가던 중이었고, <배틀액스>는 고장 수리를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21형 호위함 <액티브> 또한 고장 수리 때문에 남대서양으로 갈 수 없었고, “리앤더”형 호위함 <애리애드니>는 아직 성능 개량 공사를 받지 못해 전투가 예상되는 곳으로는 보낼 수 없었다. 12M형 호위함 <로우스토프트>는 지브롤터의 경비 임무를 맡아야 했고, <릴>은 고장 수리가 필요했다.
항공모함, 상륙함과 지상군의 출동 준비
기동부대의 핵심이 될 항공모함 <허미즈>와 <인빈서블>은 영국 남해안의 포츠머스에 있었다. 이들이 탑재하는 시해리어 FRS1 수직이착륙 전폭기는 육지의 기지로 가 있었고, <허미즈>는 정기적인 보일러 청소 및 정비를 막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1980년 영국해군에 취역하고 아직 만 2년이 넘지 않은 <인빈서블>은 노르웨이 앞바다에서 NATO의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수병들이 휴가를 받고 떠난 상태였다. 준비 명령이 떨어지자 휴가는 모두 취소되었고, <허미즈>와 <인빈서블>은 출동 준비를 시작했다. 상륙함대의 기함이 될 도크형 상륙함 <피어리스>도 정기적인 정비를 그만 두고 출동 준비에 들어갔고, 독일에 주둔하는 영국육군 “라인 군단”의 보급을 위해 1960년대에 영국육군의 예산으로 건조한 <써 랜슬럿>형 상륙함 (Landing Ship Logistics, LSL) 5척 또한 출동하게 되었다. 곧 퇴역해 매각 처분될 운명이었던 수송함 <스트롬니스>도 이미 뜯어낸 중요 장비들을 급히 다시 붙이고 출동하게 되었는데, 이 배는 350명의 해병대원과 7,500명을 한 달 동안 먹여 살릴 물자를 싣도록 명령 받았다.
이렇게 군함들이 준비될 동안 해병대도 준비를 시작했다. 4월 2일 새벽 3코맨도여단은 명령이 떨어지면 72시간 안에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원래 항상 7일 안에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던 3코맨도여단의 3개 대대는 이 때 널리 퍼져 있었다. 40코맨도대대는 리버풀에서 개인화기 훈련을 하고 있었고, 42코맨도대대는 노르웨이에서 NATO의 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휴가 중이었으며, 45코맨도대대는 스코틀랜드에서 막 휴가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게다가 45코맨도대대의 Y중대는 동남아시아의 브루네이에서 정글 훈련을 마치고 홍콩에 가 있었고, 3코맨도여단의 본부와 해군 상륙함대 사령부의 주요 참모 장교들은 NATO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덴마크에 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급히 소집되었고, 3코맨도여단의 방공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육군의 레이피어 지대공 미사일 포대가 추가되었다. 여기에 스코피언 경전차와 시미터 장갑차 부대인 육군 "블루스 앤드 로열스" 연대의 2개 중대 또한 추가되어 3코맨도여단은 모두 3,500명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4월 3일 또 하나의 부대가 3코맨도여단에 추가되었다. 이 부대는 영국육군의 가장 사나운 부대라고 할 수 있는 공수연대의 3대대였고, 3코맨도여단은 이제 4,35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추가되자 항공모함 <허미즈>의 임무가 갑자기 바뀌게 되었다. <허미즈>는 원래 시해리어 FRS1 전폭기와 시킹 HAS5 대잠수함전 헬리콥터를 싣고 포클랜드 주변의 해상통제권을 확립하는 임무를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허미즈>는 4월 2일에 800명의 해병대원과 이들을 태울 시킹 HC4 수송 헬리콥터도 싣도록 명령을 받았고, 바로 다음 날 공수연대 3대대가 3코맨도여단에 추가되자 항공모함과 상륙함 만으로는 이들을 모두 태울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결국 <허미즈>에 해병대원 800명을 태우는 것은 없던 얘기가 되었고, 대신 <허미즈>는 해병대원을 120명만 싣고 시킹 HC4 수송 헬리콥터는 9대를 싣게 되었다. 4,350명 중에서 해군과 보조선대 RFA가 태워 나를 수 있는 숫자는 절반을 약간 넘었고, 적어도 2,000명과 대부분의 차량 및 물자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민간상선을 빌리는 것이었다.
민간상선의 동원
3코맨도여단이 4,350명으로 늘어나게 된 4월 3일, 영국의 해운회사 P&O의 여객선 <캔브라>가 1,400명의 해병대원과 600명의 공수부대원을 태울 수송선으로 지목되었다. 이들의 차량과 장비를 실어 나를 배로는 같은 회사의 카페리인 <엘크>가 꼽혔는데 1978년에 이 배를 만든 곳은 우리나라의 현대중공업이었다. 이렇게 P&O의 <캔브라>는 2,000명의 병력을 싣고, <엘크>는 2,000톤의 탄약과 수백 톤의 장비를 실어 나르게 되었는데, P&O는 이 2척이 전투 병력을 싣고 전투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보험료가 엄청나게 오를 것이니 이 배들을 빌리지 말고 아예 징발하라고 국방부에 요구했다. 이에 노트 국방장관은 온 영국이 아르헨티나에 대한 분노로 들끓고 있을 때 모든 일을 재빨리 처리하기를 원했고 민간상선의 징발은 4월 4일에 처리되었다. 이렇게 징발된 민간상선은 <캔브라>와 <엘크> 말고도 유조선 3척을 포함해서 많은데, 이들을 "Ships Taken Up From Trade, STUFT"라고 부른다. 그런데 STUFT는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영국인이 아닌 외국인 선원을 쓰고 있던 경우가 많았고, 이들이 전쟁터로 갈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캔브라>에서는 400명의 외국인 선원들이 내리게 되었고 모든 STUFT에는 지휘와 통신을 맡을 해군 장교와 수병이 타게 되었다. 보조선대 RFA의 수송함과 군수지원함에는 영국의 식민지 홍콩에서 모집한 중국인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보조선대 RFA의 배들은 STUFT와 달리 처음부터 군함이었고, 또 중국인 선원들의 고용 계약이 전쟁 상황도 포함하기 때문에 이들은 그대로 남았다. 참고로 영국해군 항공모함의 세탁소는 모두 홍콩 출신 중국인들이 운영한다.
피어리스와 엘크
항공모함 허미즈와 인빈서블
기동부대의 기함을 맡게 될 항공모함 <허미즈>는 2차대전 중이던 1944년 6월에 배의 등뼈라고 할 수 있는 용골을 놓은 꽤 오래된 배였고 원래 이름은 코끼리를 뜻하는 <엘리펀트>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해 2차대전이 끝나자 <엘리펀트>는 건조 공사가 일단 중지되었고, 그 해 11월에 이름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인 <허미즈>로 바뀌었다. <허미즈>는 만들다가 만 상태로 거의 8년을 보낸 다음 1953년에야 진수되었고, 새로 발명된 증기 캐터펄트 2대, 경사비행갑판 (angled deck), 세계 최초의 3차원 레이더인 984형 레이더, CDS 레이더 데이터 처리 및 디스플레이 시스템을 갖추는 변경된 설계로 완성되어 1959년 11월에야 영국해군에 취역했다. 용골을 놓고 무려 15년이 지나서야 취역한 지각생 <허미즈>는 당시로서는 최신 시설을 갖추었지만 만재배수량이 27,800톤에 불과해 영국해군의 공격 항공모함 5척 중에서 두 번째로 작았고, 시빅슨 FAW1 전투기 12대, 핵폭탄을 운용할 수 있는 시미터 F1 전폭기 8대, 개닛 AEW3 조기경보기 4대, 기타 헬리콥터 6대, 모두 합쳐 30대의 항공기를 실었다. <허미즈>는 1961년에 영국해군 극동함대로 파견되어 1964년까지 대서양이 아니라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수역, 다시 말해 “East of Suez”에 배치되어 있었고, 1964년 영국으로 돌아와 1966년까지 2년에 걸친 성능 개량 공사를 받았다.
1967년 홍콩에 입항하는 허미즈
새로운 버커니어 S2 공격기 7대와 개량된 시빅슨 FAW2 전투기 12대를 운용하게 된 <허미즈>는 1967년 4월에 공격 항공모함 <빅토리어스>와 교대하기 위해서 다시 “East of Suez”로 떠났고,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중요한 해상교통로인 티란 해협을 봉쇄한 1967년 5월에는 처음으로 실제 전투에 투입될 뻔 했다. 이 때 영국은 미국과 함께 다국적 함대를 조직해서 무력을 써서라도 티란 해협의 자유 통항을 보장하는 방안을 생각했고, 네덜란드해군, 캐나다해군과 일본의 해상자위대까지 이 다국적 함대에 초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6월에 이스라엘이 “6일 전쟁”으로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자 다행히 <허미즈>가 싸워야 할 일은 없게 되었는데, 작은 <허미즈>가 이집트의 공군과 해군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되어 이 때부터 공격 항공모함으로서 <허미즈>의 가치는 내리막길이었다. 너무 작아서 새로운 F-4K 팬텀 II 전폭기를 운용할 수 없었던 <허미즈>는 1970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증기 캐터펄트와 3차원 레이더를 떼어냈고, 헬리콥터 탑재 상륙함으로 (LPH) 개조하는 공사를 받은 다음 1973년에 다시 취역했다. LPH로서 <허미즈>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노르웨이의 북부 지방으로 영국과 네덜란드의 해병대를 실어 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1976년부터 <허미즈>는 NATO의 요청에 따라 시킹 대잠수함전 헬리콥터를 탑재하기 시작해 대잠수함전 항공모함의 임무도 맡기 시작했고, 1980년부터는 시해리어 FRS1 수직이착륙 전폭기도 탑재해 다시 항공모함의 역할로 돌아왔다. <허미즈>는 원래 해군항공대 800대대의 시해리어 FRS1 전폭기 8대를 실었는데 남대서양으로 출동하게 되자 여기에 훈련부대인 899대대의 4대가 더 추가되어 12대를 싣게 되었고, 826대대의 시킹 HAS5 대잠수함전 헬리콥터 9대, 846대대의 시킹 HC4 헬리콥터 9대까지 더해 모두 30대의 항공기를 싣게 되었다.
1980년에 취역한 영국해군의 가장 새로운 항공모함인 <인빈서블>은 그 탄생 과정이 복잡했다. 1960년대 전반에 새로운 50,000톤급 공격 항공모함 CVA-01이 계획되었을 때 CVA-01이 공격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대잠수함전 헬리콥터를 탑재하는 순양함이 따로 계획되었고, 이 헬리콥터 탑재 순양함은 1966년 2월 CVA-01의 건조가 취소되었을 때 다행히 살아남았다. 이 때 CVA-01 취소에 항의하며 물러난 해군제1경 <데이빗 루스> 해군대장의 뒤를 이어 해군제1경이 된 <바릴 베그> 해군대장은 “미래 함대 연구 위원단”을 만들어 <J. H. 애덤스> 해군소장을 단장으로 임명해서 주어진 예산으로 만들 수 있는 미래 함대 전력 구조를 연구해 보고하도록 명령했다. 애덤스 해군소장의 미래 함대 연구 위원단은 이제 “East of Suez”가 아닌 북대서양에서 시시한 제3세계의 해군과 공군들보다 훨씬 강한 소련해군을 상대하려면 헬리콥터 탑재 순양함으로는 부족하다고 봤고, 이 순양함의 상부구조물을 오른쪽으로 옮기고 쭉 뚫린 비행갑판을 만들어 사실상 경항공모함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 이유는 아군 함대의 위치를 파악해 공격 부대를 유도하려는 소련의 Tu-95RT 베어D 정찰기를 격추하거나 내쫓고, 느린 헬리콥터로는 제 때 갈 수 없는 200 마일 이상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미확인 선박을 찾아가 식별하는 “probe” 임무를 수행하려면 전투기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순양함에 이런 전투기를 4~5대라도 탑재할 수 있는 방법은 순양함을 경항공모함처럼 만드는 것뿐이었다. 2차대전 중에 전함 <워스파이트>의 포술장이었고, 정부 방침에 따라 항공모함은 없어도 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던 “수상함 파벌의 두목” 베그 해군제1경은 이 당돌한 건의에 분노가 폭발해 미래 함대 연구 위원단을 해체했고, 단장 애덤스 해군소장은 더 이상 진급을 못하고 해군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미래 함대 연구 위원단의 건의는 다음 해군제1경 <마이클 르파누> 해군대장이 받아들여 이 경항공모함은 1970년에 “전통 갑판 지휘 순양함 (Through-Deck Command Cruiser, TDCC)”라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1973년에 주문되어 1980년 <인빈서블>이라는 이름으로 취역했다. 1980년에 취역할 때 <인빈서블>은 더 이상 순양함이 아니라 당당하게 항공모함으로 불렸고, 해군항공대 801대대의 시해리어 FRS1 전폭기 5대를 탑재했다. 준비 명령을 받은 <인빈서블>에는 899대대의 3대가 추가되어 시해리어 FRS1 전폭기 8대가 실렸고, 820대대의 시킹 HAS5 헬리콥터 11대를 더해 모두 19대의 항공기가 실렸다. <허미즈>와 <인빈서블> 이 두 항공모함에는 시해리어 FRS1 전폭기가 쓸 미국제 AIM-9G 사이드와인더 공대공 미사일이 각각 30발과 40발 있었고, 보조선대 RFA의 군수지원함 <리소스>에는 33발이 더 있었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영국 국방부는 급히 <허미즈>로 70발, <인빈서블>로 30발을 더 보내기로 해서 이 100발을 모두 최신형 AIM-9L 모델로 미국에 주문했다.
4월 5일, 준비 명령을 받고 사흘 만에 출동 준비를 끝낸 항공모함 <허미즈>와 <인빈서블>은 수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포츠머스를 떠났다. 이 두 항공모함의 출동은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고 이것은 포클랜드를 반드시 되찾겠다는 영국의 의지를 아르헨티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었다. 4월 3일 UN에서 아르헨티나가 외교적 패배를 당하고 이틀 지나 영국 항공모함 2척이 출동했고 곧 도크형 상륙함 <피어리스>가 <써 랜슬럿>형 LSL 4척을 이끌고 따랐다. 여기에 맞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4월 6일부터 육군 8연대 병력을 수송기에 태워 포클랜드로 보냈고 4월 8일부터는 해병대 5대대도 포클랜드로 보내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 또한 이것을 널리 알려 영국의 기를 꺾으려고 했지만 4월 9일 영국에서는 해병대원과 공수부대원 2,000명을 실은 여객선 <캔브라>가 앞서 두 항공모함들처럼 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남대서양으로 출동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두 나라는 이제 서로 판돈을 너무 올려 겁쟁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물러설 수 없게 되었는데, 이 때 미국이 두 나라를 말려보겠다고 나서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이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오가는 “셔틀 외교”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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