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대에 대한 모의 핵공격 훈련
항공모함의 역할이 수송선단의 방공과 대잠수함전으로 제한되고 해군항공대가 원한 원자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함재 공격기의 개발이 중지되기 직전인 1948년 말, 영국해군의 본국함대(Home Fleet)는 카리브해의 영국령 해외 영토를 방문하고 영국 본토로 돌아오면서 소련 북부의 콜라 (Kola) 반도의 해군기지를 모의 공격하는 "Sunrise" 훈련을 실시했다.
이 훈련에서 본국함대의 장갑 중형항공모함 (fleet carrier) 일러스트리어스와 콜로서스급 비장갑 경항공모함 (light fleet carrier) 2척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의 임무는 플리머스의 "소련" 해군기지와 데본 및 콘월의 "소련" 공군기지를 모의 공격하는 것이었고 영국공군의 링컨 및 랭커스터 4발 중폭격기들이 기지를 방어하는 "소련군" 역할을 맡았다. 방어를 맡은 공군 폭격기들에게는 훈련의 규칙에 따라 2발의 원자폭탄이 있는 것으로 정해졌고 이에 대응하여 2차대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본국함대의 구축함들은 3마일 이상 떨어지고 더 큰 함정들은 4.5마일 이상 떨어지는 진형을 짰다.
훈련이 시작된 다음 날씨가 너무 나빠져 본국함대의 항공모함들은 항공기 이착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본국함대에게는 다행히도 공군 폭격기사령부의 링컨과 랭커스터 폭격기들이 전자적 기만에 속아 함대를 찾지조차 못했다. 마침내 공군 연안사령부의 해상초계형 랭커스터가 악천후를 무릅쓰고 가까스로 함대를 찾아내 1발의 원자폭탄 투하를 시뮬레이션 했다. 그러나 폭탄은 가장 가까운 구축함으로부터도 4,500야드나 떨어져서 폭발한 것으로 판정되어 함대는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훈련의 결과 넓게 퍼져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함대에 대한 원자폭탄의 위협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북대서양의 나쁜 날씨에서도 함재기를 안전하게 이착함시킬 수 있는 더 나은 항공모함과 함재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자주 파도가 거칠고 높게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북대서양의 환경에 최적화된 중형항공모함이라는 오데이셔스급 이글과 아크 로열은 건조가 계속 늦어져 1950년 초 이글은 1951년 3월에, 아크 로열은 1952년 말에 완성될 것으로 예상되었고 일러스트리어스급 중형항공모함 6척은 마침내 현대화 개장공사를 실시하기로 결정되어 1949년 포미더블부터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미더블은 점검 결과 전쟁 중에 입은 피해와 전후 4년간의 사실상 방치 때문에 상태가 너무 좋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고 대신 빅토리어스를 개조하기로 1950년 여름에 결정되었다. 빅토리어스는 1950년대 중반에 등장할 더 크고 무겁고 빠른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도록 완전히 새로운 비행갑판과 격납고를 갖게 되었고 이를 위해 선체를 반으로 자르고 새로운 플러그-인(plug-in)을 넣어 길이와 폭이 모두 커졌으며 격납고 갑판부터 그 위로는 모두 뜯어내고 새로 만들어 붙이게 되어 현대화 개장공사라기 보다는 사실상 재건조였다.
7년에 걸친 재건조 공사를 마치고 1958년 취역한 빅토리어스
항공모함의 필요성에 대한 신임 국방장관의 의문
1950년 2월 애틀리 수상의 노동당 정부는 총선거에서 승리해 재집권했다. 이어진 내각개편에서 총선거 이전에는 육군장관이었던 신웰이 국방장관으로 올라갔는데 그는 해군에 적대적이고 원자폭탄의 시대에 항공모함이 정말로 필요한지 의문을 품은 인물이었다.
신웰이 국방장관으로 취임하던 이 때 영국해군은 지중해에서 작전하는 중형항공모함에서 발진해 소련의 고속 폭격기의 집중공격을 상대할 단좌 고성능 주간 전투기와 대서양에서 작전하는 경항공모함에서 발진해 몇 대 되지 않는 소련의 저속 정찰기를 잡을 비교적 저성능의 복좌 전천후 요격기를 원하고 있었다. 대서양의 콜로서스급 경항공모함에서 출격해 저속 정찰기를 상대할 복좌 전천후 요격기는 2차대전 당시에 호위항공모함 CVE에서 발진해 독일공군의 Fw-200 정찰기를 요격한 시허리케인 전투기와 같은 개념이고 1980년대에 등장한 V/STOL 경항공모함 인빈서블급에 탑재된 시해리어 FRS1도 마찬가지이다.
1963년 멜버른 함상의 시베넘 FAW53 복좌 전천후 요격기
신웰의 국방부는 먼저 대서양에서 선단호위임무에 종사할 경항공모함에서 발진해 소련의 느린 장거리 정찰기를 격추시킬 임무를 맡을 전천후 요격기로 영국공군이 이미 쓰고 있는 베넘(Venom)을 약간 바꿔 쓰도록 요구했다. 이 때 마침 영연방의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이 영국제 마제스틱급 경항공모함 멜버른에서 운용할 수 있는 소형 전천후 요격기를 찾고 있어 영국해군은 오스트레일리아해군의 주문까지 합쳐 베넘의 해군형 시베넘(Sea Venom)의 개발에 동의했다.
그러나 영국해군은 시베넘으로는 지중해에서 소련 폭격기의 집중공격에 대처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1958년 시미터(Scimitar)란 이름으로 실전배치되는 고성능 단좌 주간 전투기의 개발을 고집했고 이 주간 전투기에 더해 새로운 고성능 복좌 전천후 요격기의 개발도 요구했다. 이 요격기는 1960년 시빅슨(Sea Vixen)이란 이름으로 실전배치된다. 영국공군 또한 시미터 및 시빅슨과 비슷한 임무를 맡는 단좌 주간 전투기 스위프트, 헌터와 복좌 전천후 요격기 재블린을 따로 개발했고 국방부와 조달청은 이 모든 것을 쓸데없는 중복투자와 낭비로 여겼다.
Tu-16 Badger가 나오기 전 소련해군항공대의 주력 폭격기였던 Tu-14 Bosun
무장은 항공어뢰
시미터
앞으로 해군과 공군의 중복투자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공군참모총장 슬레서는 해군참모총장 프레이저에게 공군의 연안사령부와 해군의 항공대를 합쳐 새로운 연합 해상 항공군, Maritime Air Force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슬레서는 이 연합 해상 항공군에서 해군은 대잠전에 집중하고 전투 및 공격 임무는 전부 공군이 가질 것을 제안했지만 프레이저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1950년 5월 11일 육해공 3군 참모총장과 함께 "국방정책 및 세계전략"이란 제목의 정책문서를 검토한 회의에서 신웰 국방장관은 항공모함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국방정책 및 세계전략"은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경우 서유럽에서 철수하고 석유가 나는 중동을 우선 지킨다는 기존의 전략으로부터 서유럽에서 소련군에 맞서 싸우는 것으로 180도 바뀐 내용을 담고 있었고 유럽 대륙에서 벌어질 대규모 지상전을 위해 육군과 공군에게 예산 배분의 우선 순위를 주었다.
국방장관은 항공모함이 왜 필요하냐고 묻고 육군과 공군이 앞으로 예산을 우선적으로 타게 되어 해군이 궁지에 몰린 이 때 마침 한국전쟁이 터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와 장소에서 터진 한국전쟁은 영국해군에게 극동함대의 콜로서스급 경항공모함 트라이엄프를 한국의 서해로 급히 보내 비록 제한전쟁이지만 해군의 항공모함이 지상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소련과의 전쟁이 이전의 계획에서 가정한 1957년보다 일찍 일어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주었다. 이 때 중립적인 육군의 템플러 중장을 위원장으로 해서 소집된 해상 방공 위원회는 소련과의 전쟁이 1954년에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해상교통로의 방공을 어떻게 가장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을 것인지 연구해서 1950년 10월 권고안을 냈다. 권고안의 내용은 해군의 손을 들어 준 것이었다. 해상 방공 위원회는 소련 폭격기의 위협으로부터 지중해의 해상교통로를 지키려면 중형항공모함과 고성능 전투기가 필수적이라고 인정했고 대서양에서 통상파괴전을 시도할 소련해군의 스베르들로프급 순양함을 상대하기 위해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공격기도 필요하다고 인정했다. 신웰 국방장관은 해상 방공 위원회의 권고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로써 영국해군은 항공모함을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처칠의 재집권과 핵전쟁에서 해군의 역할
1951년 10월 처칠의 보수당은 총선거에서 노동당을 이기고 6년 만에 정권을 탈환했다. 처칠이 재집권할 때 소련은 원자폭탄을 성공적으로 시험한지 이미 2년이 지났고 영국은 첫 원자폭탄을 시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뿐만 아니라 영국도 곧 핵무기를 갖게 된 이 때 영국정부는 이제는 더 이상 1957년이나 1954년 전쟁이 난다는 가정을 하고 여기에 맞춰 2차대전 식의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없고 경제를 위해 그런 전쟁준비는 해서도 안되며 앞으로의 국방은 장기적인 억지력 확보에 중점을 두어야 함을 깨달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1952년 4~5월 육해공 3군 참모총장은 그리니치 해군대학에 모여 국방정책과 세계전략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했다. 1952년의 “세계전략” 문서는 1952년부터 앞으로 5년간의 국방정책의 기본을 세웠고 NATO라는 큰 틀의 안에서 각 군의 역할을 정의하고 그 역할의 수행에 필요한 전력을 결정했다. 이 문서는 영국은 혼자서 소련과 싸워 이길 수 없고 독자적으로 소련의 도발을 억지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영국공군의 새로운 밸리언트, 빅터, 벌컨 폭격기부대의 주요 역할은 소련의 핵전력에 대한 반격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정해졌지만 소련에 대한 주요 억지력은 미국공군의 핵공격력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 또한 인정되었다. 앞으로 영국공군 폭격기부대의 역할은 영국에게 매우 중요한 표적에 대한 미-영 연합 핵공격 지휘에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58년 8월 16일 찍힌 미국해군 항공모함 미드웨이
A-3 스카이워리어 핵공격기를 12대까지 탑재
세계전략문서는 소련과 전쟁이 벌어지면 처음부터 서로 핵폭탄을 주고 받아 양쪽 모두 큰 피해를 입을 것이지만 곧바로 전쟁이 끝나지는 않고 살아남은 전력으로 전투를 계속하며 회복을 시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양쪽이 핵공격을 교환하고 큰 피해를 입은 채로 전쟁이 계속 될 것이라는 이 개념에는 "broken-backed war (허리가 부러진 채로 하는 전쟁)"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broken-backed war의 주요 전장은 핵공격에서 살아남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해상교통로가 될 것이라고 세계전략문서는 예상했다. 영국해군은 역할은 당연히 broken-backed war에서 해상교통로를 지키는 것으로 정의되었지만 영국해군은 이러한 방어적인 역할에 더해 새로 창설된 NATO 스트라이킹 플리트의 일원으로서 핵공격에도 참여하기 위해 미국공군의 폭격기공세에 동참해 영향력을 확보한다는 영국공군의 폭격기부대 정당화 논리와 같은 주장을 폈다. 다시 말해 미-영 연합 핵공격력에 영국공군의 폭격기부대를 포함시켜 미국공군의 B-36 피스메이커 및 B-47 스트래토제트 폭격기부대 지휘에 대한 영향력을 갖는 것만큼이나 NATO 스트라이킹 플리트에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영국해군의 공격기부대를 포함시켜 미국해군 AJ 새비지 또는 A3D 스카이워리어 공격기부대 지휘에 대한 영향력을 갖는 것도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핵공격력 확보를 위한 1952년형 중형항공모함 설계
이를 위해 영국해군은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대형공격기 개발을 다시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 대형공격기를 탑재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55,000톤급 항공모함이 계획되었다. 이 55,000톤급 항공모함은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을 힘들여 재건조 하는 것보다 아예 새로 만드는 것이 더 빠르고 싸다는 판단에 따라 계획되었고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중의 1척인 포미더블과 헌트급 구축함 몇 척을 해체해서 나온 강철로 만들 예정이었다.
신형 항공모함은 1952년 4월 경사비행갑판을 갖추고 중량 6만 파운드의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는 함정으로 정의되었고 1956년에 용골을 거치할 계획이었는데 3개월 후인 1952년 7월에는 영국공군의 캔버러 쌍발제트폭격기의 해군형을 운용할 수 있도록 이함중량이 7만 파운드로 늘어났고 격납고의 높이는 이글과 아크 로열의 17피트 6인치보다 25% 높아진 22피트로 바뀌었다. 사출기는 3개 또는 4개를 장비하기로 했고 속력은 32노트, 레이다는 새로운 984형 3차원 레이다를 달기로 했다. 이어 1952년 9월에는 배수량이 52,000톤으로 바뀌었고 그 해 9월 예비 연구를 끝내고 12월 상세 설계 시작, 1953년 12월 설계 제출, 1954년 1월 주문, 1954년 5월 용골 거치, 1958년 12월 31일 완성으로 진행 일정이 잡혔다.
그러나 처칠의 보수당 정권은 2차대전 중에 건조를 시작한 중형항공모함 아크 로열이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마당에 신형 항공모함의 건조를 새로 시작할 수 없다고 제동을 걸었고 영국해군은 1953년 4월 더 싸고 작은 항공모함을 만드는 것은 어떻겠냐고 양보했지만 1953년 7월 신형 항공모함의 건조는 완전히 취소당했다. 취소 당시 이 신형 항공모함은 배수량 53,150톤의 선체에 길이가 각각 200피트와 150피트인 증기 사출기 2대를 갖추고 함재기의 이함 중량 6만 파운드, 착함 중량 4만 5천 파운드로 설계되었다. 함재기는 연료와 무장을 뺀 기체만의 중량 3만 3천 파운드 공격기 12대, 2만 2천 파운드 전투기 33대, 1만 6천 5백 파운드 대잠기 8대를 탑재하고 격납고의 높이는 이글 및 아크 로열과 같은 17피트 6인치로 되었다. 함재기의 이함 중량이 7만에서 6만 파운드로, 격납고의 높이가 22피트에서 17피트 6인치로 다시 줄어든 이유는 캔버러 쌍발제트폭격기의 해군형 대신 훨씬 발전된 설계와 성능의 새로운 제트공격기 요구사항 NA39가 제출되어 이 신형 핵공격기를 탑재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NA39는 버커니어로 개발되어 1963년 실전배치된다.
60년대 초 빅토리어스 함상의 버커니어 S1 공격기
핵폭발의 섬광에 대비한 anti-flash 도장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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