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1일 영국해군의 시해리어 FA2가 완전히 퇴역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크게 활약하며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한 세대를 풍미한 시해리어의 기원, 역할, 능력 및 실전기록에 대해 알아보자.
시해리어의 기원
시해리어는 1969년 4월 영국공군 제1전투기대대에 실전 배치된 세계최초의 수직이착륙 전폭기 해리어 GR1에서 파생되었다. 해리어 자신은 1960년 10월 21일 처음으로 수직 이륙한 영국의 항공기 제작사 호커의 시험기 P1127로부터 개발된 것인데 P1127이 실용 전폭기 해리어로 발전된 과정에는 사실 복잡한 사연이 있다.
해리어의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은 1955~1956년 프랑스의 항공기술자 Michel Wibault가 미국과 프랑스공군에 제안한 추력편향노즐의 컨셉트에 있다. 이 추력편향노즐이 해리어의 수직이착륙을 가능케 한 핵심기술인데 이 때 미국과 프랑스공군은 Wibault의 제안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미국 국방부의 상호무기개발사업 MWDP의 파리 사무소에서 관심을 보였다. MWDP는 Wibault가 자신이 고안한 추력편향노즐을 붙일 후보로 지목한 오라이언 엔진을 만드는 영국의 브리스톨 에어로 엔진에 Wibault의 제안서를 넘겼고 해리어의 개발에서 영국의 역할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브리스톨은 Wibault의 제안을 가다듬어 나중에 페가서스로 이름이 바뀌는 BE53이라는 엔진을 고안했고 추력편향노즐의 잠재력에 주목한 MWDP는 1958년 이 엔진의 개발비의 75%를 대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항공기술자가 처음 제안해서 미국 국방부의 돈으로 영국 회사가 해리어의 원천기술이 되는 추력편향노즐이 달린 엔진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 때 브리스톨의 BE53 엔진 홍보자료를 받아 본 호커는 2000 파운드의 무장을 운반할 수 있는 수직이착륙 지상공격기를 설계해서 P1127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침 헌터 FGA9 지상공격기의 후계기를 물색하던 영국공군이 관심을 보여 1959년 5월 호커는 3대의 P1127 시작기를 일단 주문도 받지 않은 채 만들기 시작했고 1년이 지나 1960년 6월 27일 영국 조달청의 주문이 뒤따랐다. 공군이 먼저 요구사항을 내고 항공기 제작사가 여기에 맞춰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진행된 이 사업은 빠른 진전을 보여 해리어 원형기 P1127이 1960년 10월 21일 드디어 처음으로 호버링에 성공한다. 이듬해 1961년 8월 더 큰 기회가 찾아왔다. NATO는 이탈리아의 피아트가 만든 G91 지상공격기의 후계기가 될 초음속 수직이착륙 전폭기 요구사항 NBMR3을 내놓았고 여기에 호커는 초음속 수직이착륙 전폭기 P1154를 제안한다.
영국 공군형 단좌 공격기 P1154 RAF
초음속 P1154
P1154는 P1127을 크게 만들고 원래 추력 3만 파운드의 강력한 브리스톨 시들리 BS100 엔진을 단 전폭기였다. 원래 애프터버너가 없는 페가서스 엔진에 애프터버너 역할을 하는 <플레넘 체임버 버닝>이라는 것을 추가한 것이 바로 BS100 엔진이다. P1154에는 영국공군뿐만 아니라 영국해군도 관심을 보였고 1962년 4월 영국정부는 공군의 헌터 FGA9와 해군의 시빅슨 FAW2를 P1154 하나로 교체하도록 지시했다. P1154는 40년도 더 된 옛날에 <영국의 조인트 스트라이크 파이터>가 된 것이다. NATO의 NBMR3에서는 1962년 4월 영국의 P1154가 프랑스의 미라지 IIIV를 물리치고 사실상 선택되었지만 프랑스가 혼자서라도 미라지 IIIV를 만들어 쓰겠다고 고집해 사업 자체가 끝장났다.
1980년의 플레넘 체임버 버닝 시험
1960년대 영국의 JSF였던 P1154는 <East of Suez>, 다시 말해 중동/인도양/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공군소속으로 90대, 해군 소속으로 60대가 배치되고 군수지원과 훈련은 공군과 해군이 하나로 통합된 조직에서 제공할 계획이었다. 이것은 2000년 4월 1일 탄생한 <조인트 해리어 포스>와 똑같은 개념이고 공군 90대와 해군 60대란 숫자 또한 영국이 사들이려고 하는 F-35B 조인트 스트라이크 파이터의 숫자와 똑같다. 지금 영국의 F-35B 구매 및 항공모함 계획이 1960년대 초의 계획과 사실상 같은 셈이다. 이 때 해군은 <East of Suez>에 배치할 항공모함 2척에 해군 P1154를 20대씩 싣고 전시에 공군 P1154 10대가 항공모함으로 와서 함께 작전한다는 구상을 펼쳤다. 그러나 공군은 인도양의 여러 섬에 건설된 공군기지에 P1154를 배치하고 당시 공군참모총장 Thomas Pike의 이름을 딴 <Pike Ship>이라는 우리 LPX와 비슷한 개념의 간단한 수송함에서 P1154를 운용하자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국정부는 일단 해군의 편을 들어 P1154를 실을 새로운 50,000톤 항공모함 CVA-01 사업을 1963년 승인했다. 그러나 해군은 해군형 P1154인 P1154 RN은 단좌인 공군형 P1154 RAF와 달리 반드시 복좌이고 강력한 레이더를 달아야만 한다고 주장했고 게다가 캐터펄트로 발진하는 것까지 요구했다. 결과는 이름만 같고 내용은 완전히 다른 비행기였다. 어차피 완전히 다를 것이면 P1154 RN에서 브리스톨 시들리 BS100 엔진을 빼고 대신 롤스로이스 RB168 스페이 터보팬 엔진 2개를 달아 수직이착륙이 아닌 보통의 전폭기로 만들자는 제안까지 나왔지만 결국 1964년 2월 해군은 P1154 사업에서 완전히 빠지고 대신 RB168 스페이 엔진을 단 F-4K 팬텀 II를 미국에 주문한다.
영국 해군형 복좌 요격기 P1154 RN
해리어의 개발과 TDCC
초음속 P1154 사업이 진행되던 동안 찬밥신세였던 아음속 P1127은 1963년 2월 8일 항공모함 아크로열의 비행갑판에 수직으로 내려 세계 최초의 수직 착함 기록을 세웠다. 수직이착륙 전폭기가 항공모함에 실전 배치되는 16년 후의 미래를 살짝 보여준 것이다. P1127은 P1154가 있는 한 시험기로 머물고 말 운명이었지만 1964년 10월 총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해 정권을 잡자 모든 것이 바뀌고 만다. 노동당 정권은 국방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모든 군용기 사업을 재검토했고 1965년 2월 P1154 사업을 돈이 너무 많이 든다며 취소하고 공군도 미국에서 F-4M 팬텀 II를 사다 쓰도록 했다. 1년 지나 1966년 2월에는 해군의 CVA-01도 취소당한다.
대신 노동당 정권은 아음속 P1127을 수직이착륙 지상공격기로 개발하도록 결정했고 P1127은 케스트렐 FGA1이란 이름으로 미국과 서독이 참여한 시험 평가를 거치고 나서 1969년 4월 해리어 GR1으로 영국공군에 실전 배치되었다. 공군에서 초음속 P1154 대신 아음속 P1127이 실용 전폭기로 개발되어 해리어가 되었듯이 해군에서는 50,000톤 CVA-01 대신 1966년부터 연구한 <지휘순양함>이 1970년에 이르러 거의 20,000톤의 <Through Deck Command Cruiser>로 변신했다. TDCC는 1973년 발주되어 1980년 경항공모함 인빈서블로 취역한다. 드디어 시해리어가 등장할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시해리어의 임무와 미국해군의 SCS 구상
앞서 케스트렐 FGA1은 1966년 영국해군의 LPH형 상륙함 불워크에서 함상 운용 시험을 거쳤고 1969년에는 의회에서 해군장관이 비록 한자리 숫자이나마 공군의 해리어를 해군의 LPH형 상륙함과 지휘순양함에서 운용하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쭉 뚫린 비행갑판이 있는 (through deck)> 지휘순양함에서 5대 정도의 아음속 수직이착륙 전폭기를 운용하자는 발상은 언뜻 보면 강력한 폭격기 부대를 가지고 있는 소련 해군항공대를 상대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항공모함이 단독으로 적의 강력한 폭격기 세력의 행동 반경 안으로 들어가서 작전할 수 있어야만 하고 함재 전투기는 적의 1선급 전투기와 싸워 이길 수 있어야만 한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생각할 때에나 맞는 이야기이다.
2차대전 당시 독일공군의 Fw-200 콘도르 정찰기는 독일해군 U보트가 공격할 표적을 찾아주기 위해 호위 전투기 없이 대서양 멀리 나왔다. 이에 대응해 영국해군은 시허리케인과 같은 2선급 전투기를 상선을 개조한 호위 항공모함에 싣고 Fw-200 콘도르 정찰기를 격추하거나 쫓아내 대서양을 건너는 수송선단을 지켜냈다. 그 후 1960년대 중반 소련해군은 수상함대의 SS-N-3 장거리 함대함유도탄 표적획득을 위해 <Tu-95RT 베어 D> 정찰기를 배치했다. 항속거리가 아주 긴 정찰기는 전투기를 붙여 처음부터 끝까지 쭉 호위해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혼자서 멀리 나올 수밖에 없고 이러한 정찰기는 소수의 아음속 전투기로도 충분히 쫓아 내거나 잡을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1960년대 미국해군은 아음속 A-4B 스카이호크 공격기를 AIM-9B 사이드와인더 2발로 무장시켜 에섹스급 대잠수함전 항공모함에 4대씩 배치했다. 영국해군이 TDCC에 5대씩 배치하려는 해상작전 <Maritime Harrier>의 역할도 함대의 위치를 파악해 공격 부대를 유도하려는 정찰기를 격추하거나 내쫓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느린 헬리콥터로는 제 때 커버할 수 없는 200 마일 이상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미확인 선박을 찾아가 식별하는 <probe>와 대함 공격도 <매리타임 해리어>의 역할로 정해졌다.
1964년 대잠 항공모함 CVS-20 베닝턴에서 발진해 소련 Tu-16 배저를 요격하는 A-4B 스카이호크
영국해군이 TDCC의 건조를 추진할 때 미국해군은 TDCC와 거의 같은 크기의 경항공모함인 <Sea Control Ship>을 구상했다. SCS에 탑재할 항공기는 SH-3H 시킹 헬리콥터 11대, SH-3G 시킹 조기경보 헬리콥터 3대, AV-8A 해리어 3대, LAMPS 헬리콥터 2대였고 AV-8A 해리어 3대의 역할은 적의 정찰기를 내쫓고 함대의 진행방향의 옆에 소노부이를 뿌리는 것이었다. SCS와 그 호위함들은 소련의 초음속 폭격기가 나오는 해역으로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기에 미국해군은 아음속에 레이더도 없는 3대의 AV-8A 해리어만으로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다.
SH-3G 시킹 조기경보 헬리콥터는 E-1 트레이서 조기경보기의 APS-82 레이더를 달고 1972년 시험비행을 했고 여기에 더해 앞으로 AV-8A 해리어를 대체할 XFV-12A라는 마하 2급의 초음속 수직이착륙 전폭기의 개발까지 시작되었다. 미국해군은 LPH형 상륙함 LPH-9 괌에 해병대의 AV-8A를 싣고 임시 SCS로 시험해 1973년 여름 대서양에서 AV-8A 해리어가 소련의 베어 정찰기를 실제로 내쫓았다. 이 때 레이더 없는 AV-8A 해리어는 SPS-48 3차원 레이더가 달린 순양함 CG-28 웨인라이트의 도움을 받아서 베어를 찾아냈다. 그러나 SCS는 미국해군 내부에서 반대가 너무 커서 1974년 예산에서 사라지고 말았고 SH-3G 조기경보 헬리콥터와 XFV-12A 역시 흐지부지되었다. 다만 SCS의 설계는 스페인에 팔려 경항공모함 프린시페 드 아스투리아스가 된다.
XFV-12A 초음속 수직이착륙 전폭기의 상상도
돈을 아끼기 위해 A-4의 전방동체를 F-4의 중앙동체에 붙여 엉성하게 만든 XFV-12A
시해리어 FRS1의 실전배치
영국해군은 1972년 8월 드디어 TDCC에서 운용할 <시해리어>의 소요를 제기했고 11월 호커 시들리가 설계 계약을 땄다. 영국정부는 1973년 12월 시해리어를 주문하려고 했지만 10월의 4차 중동전쟁이 몰고 온 오일 쇼크 때문에 연기하고 1975년 5월에야 24대의 주문을 확정했다. 이 때 무기수집가라는 별명이 붙은 이란의 팔레비 왕이 시해리어와 인빈서블급 경항공모함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계약이 성사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4년 후 1979년 6월 18일 첫 <시해리어 FRS1>이 영국해군에 인도되었고 이듬해 1980년 7월 11일 인빈서블이 취역했다.
시해리어 FRS1은 해리어 GR1과 비교했을 때 조종석이 높게 튀어나오고 기수에 링스 헬리콥터의 시스프레이 레이더에서 파생된 블루폭스 레이더가 설치된 것이 가장 다른 점이다. 블루폭스는 중고도-고고도의 느린 대형 정찰기 요격에 맞춰져 더 낮게 나는 표적을 탐지, 추적하는 Look Down 능력이 없고 공대공 Track While Scan도 할 수 없다. 대신 블루폭스에는 해상탐색 모드와 공대지 거리측정 모드가 있다. 시해리어의 폭격 방법 중에서 ASB1 모드는 폭탄을 그냥 던지는 것이고 ASB2는 속도, 고도, 강하각도를 컴퓨터로 계산해서 던진다. 가장 정확한 ASB3 모드에서는 블루폭스로 얻은 표적까지의 거리를 추가해서 폭탄의 탄착점을 연속적으로 계산해 던지고 CEP는 100피트 이하이다. 1976년 영국의 저명한 항공 저널리스트 Bill Gunston은 시해리어 FRS1이 당시 <UK 스패로>라고 부르던 <스카이플래쉬>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을 당연히 운용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이 예상은 빗나가 시해리어 FRS1의 공대공무장은 AIM-9G 사이드와인더 2발과 ADEN 30mm 기관포 2문에 머물렀다.
인빈서블급 경항공모함에서 5대만 탑재하도록 계획된 시해리어의 운용 방법은 1대가 하늘에 떠 있고 또 다른 1대가 출격을 준비하는 <one up, one ready>였다. 적의 전투기가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는 대양의 한가운데서 적의 정찰기를 상대할 경우에는 상호 엄호를 위해 2대가 함께 출격할 필요는 없다. 실제로 1981년 NATO의 북대서양 훈련에서 경항공모함 인빈서블에 탑재된 801대대의 시해리어 5대는 5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최소한 1대의 시해리어를 항상 하늘에 띄우며 함대의 180도 섹터를 지켰다.
포클랜드전쟁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는 영국의 해외영토인 포클랜드 제도를 갑자기 침공해 점령했다. 침공에 미리 대비하지 못했던 영국정부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그곳에 사는 2000여명의 영국계 주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3일만에 급히 경항공모함 허미즈와 인빈서블을 중심으로 기동부대를 만들어 포클랜드로 출동시켰다. 기동부대의 기함 허미즈에는 해군항공대 800대대의 시해리어 12대, 대공전 통제함 인빈서블에는 801대대의 시해리어 8대가 실려 있었다. 이 20대의 시해리어가 상대해야만 하는 아르헨티나의 공군과 해군은 미라지 IIIEA 전투기 16대, 미라지 5의 이스라엘제 불법복제판인 대거A 전폭기 35대,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 5대, A-4B/C 스카이호크 공격기 62대, 캔브라 B62 쌍발제트폭격기 10대 등 모두 208대를 가지고 있어 10배가 넘었다.
영국함대가 포클랜드로 내려가고 있던 4월 21일, 아르헨티나공군의 보잉707 정찰기는 기수에 설치된 악천후 회피용 레이더로 영국함대의 함정 숫자와 위치를 미리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금지한 영국군의 교전수칙을 악용해서 접근을 시도했다. 즉시 허미즈에서 시해리어 1대가 날아올라 보잉707을 몰아냈고 보잉707과 시해리어의 숨바꼭질은 보잉707이 또 오면 격추시키겠다고 영국이 스위스를 통해 아르헨티나에 통보한 24일까지 계속되었다. 원래 북대서양에서 소련의 Tu-95 베어를 잡으려고 만든 시해리어가 엉뚱하게도 남대서양에서 아르헨티나의 보잉707을 내쫓으며 실전을 경험하기 시작한 셈이다.
포클랜드를 되찾기 위한 본격적인 전투는 5월 1일 시작되었다. 이날 인빈서블의 시해리어 2대는 미라지 IIIEA 2대와 맞붙어 1대를 격추하고 다른 1대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이 기체는 포트 스탠리 비행장에 비상착륙을 하려다 대공포대의 오인사격에 격추당한다) 또 다른 시해리어 2대는 3대의 캔브라 B62 폭격기 편대를 요격해 1대를 격추했다. 여기에 더해 허미즈의 시해리어 2대는 무모하게 혼자 나온 대거A 1대를 격추했다. 이 첫날의 공중전이 6월 14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르헨티나군의 작전에 아주 큰 영향을 준다. 얕봤던 아음속 시해리어에게 노련한 고참 조종사가 모는 아르헨티나공군의 최고성능 초음속 전투기 미라지 IIIEA를 잃고는 앞으로 시해리어와의 교전을 피하도록 한 것이다.
허미즈의 스키 점프에서 발진하는 해군 800대대의 시해리어 FRS1
5월 1일의 전투를 자세히 살펴보면 시해리어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23 : 0의 일방적인 공중전 스코어를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가 적기의 앞이나 옆을 향해 쏠 수 있는 AIM-9L 사이드와인더, 비행 중에 노즐을 아래로 꺾는 VIFF 기동, 아르헨티나의 전투기들은 지상 레이더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모조리 거짓임을 알 수 있다. 이날 미라지 IIIEA 1대에 AIM-9L로 피해를 입힌 스티브 토머스 대위는 앞에서 다가오는 미라지 IIIEA의 정면에 AIM-9L을 쏘려고 했지만 록온이 되지 않아 쏘지 못했고 결국 적기의 뒤를 물고 쐈다. 이 미라지 IIIEA는 가까이서 터진 AIM-9L의 파편을 맞고 스탠리 비행장으로 비상착륙하려다 아군의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고 만다. 나머지 미라지 IIIEA 1대, 대거A 1대, 그리고 캔브라 B62 1대 모두 뒤에서 쏜 AIM-9L을 맞았다. 오히려 이날 격추된 이스라엘제 대거A 1대가 이스라엘제 샤프릴2 공대공미사일 1발을 다가오는 시해리어 2대 중의 1대의 정면에 먼저 쐈다. 이 시해리어는 고도 15000피트에서 5000피트까지 급강하해서 샤프릴2를 겨우 피했고 무모하게 혼자 출격했던 대거A는 다른 시해리어가 쏜 AIM-9L에 맞아 공중폭발하고 만다. 이날 이후 AIM-9L에 의한 격추는 모두 시해리어가 아르헨티나의 A-4B/C 스카이호크와 대거A의 뒤에서 쏜 것이다.
VIFF 기동은 적기에게 뒤를 물렸을 때 노즐을 아래로 꺾어 급히 속도를 줄이며 위로 올라가 적기가 앞으로 튀어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 기동은 1970년대에 미국해병대의 AV-8A 부대가 개발한 것인데 조종사 교환 근무를 통해 영국공군과 해군에도 알려졌다. VIFF는 기동 에너지를 급격히 감소시키기 때문에 뒤를 문 적기를 떨칠 방법이 VIFF 밖에 없을 때만 쓰는 <최후의 발악>과 같은 기동이고 뒤를 물리지 않는 한 쓸 이유가 없다. 포클랜드 항공전에서 상대방의 뒤를 문 쪽은 언제나 시해리어였고 VIFF 기동은 실전에서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날 시해리어는 구축함 글래모건의 요격관제를 받았고 미라지 IIIEA와 대거A는 포클랜드에 배치된 TPS-43F 3차원 및 TPS-44 2차원 레이더를 이용한 요격관제를 받았다. 아르헨티나의 전투기들이 지상 레이더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주장은 거짓이고 오히려 TPS-43F와 TPS-44가 시해리어를 미리 발견한 덕분에 A-4B/C 스카이호크와 대거A가 시해리어를 피할 수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시해리어는 형식명 FRS1에서 전투를 뜻하는 F와 공격을 뜻하는 S말고도 R에 해당하는 정찰 임무 또한 수행했다. 아르헨티나해군의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에서 출격한 S-2E 트랙커의 레이더 전파가 5월 2일 0시 12분 인빈서블의 ESM에 잡혔다. 이 전파를 낸 항공기가 정찰 임무에 투입된 아르헨티나공군 C-130 수송기라고 판단한 인빈서블은 요격하기 위해 0시 31분 시해리어 1대를 발진시켰다. 시해리어는 블루폭스 레이더를 켜지 않고 RWR에만 의지한 채 영국함대로부터 150마일 떨어진 곳까지 날아갔고 여기서 갑자기 RWR이 909형 시다트 사격통제 레이더의 전파를 탐지했다. 이 전파는 베인티싱코 데 마요를 호위하는 42형 시다트 구축함 허큘리즈의 909형 사격통제 레이더가 낸 전파였고 위협을 느낀 시해리어는 즉시 고도를 낮췄다. 해군에 파견 근무 중이던 조종사 이언 모티머 공군대위는 0시 58분 블루폭스 레이더로 25마일 떨어진 해상에 있는 5개의 물표를 확인한 다음 1시 57분 인빈서블로 돌아와 영국함대로부터 200마일 거리에 있는 아르헨티나함대 발견을 보고했다. 시해리어의 원래 임무 중의 하나로 계획된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미확인 선박을 찾아가 식별하는 <probe>를 수행한 것이다.
허미즈에 수직 착함하는 해군 800대대의 시해리어 FRS1
기동부대가 출동할 때 20대였던 시해리어는 8대가 증강되어 모두 28대가 전쟁에 투입되었고 허미즈에는 최대 15대, 인빈서블에는 최대 10대가 탑재되었다. 이 28대는 4월 5일부터 6월 30일까지 모두 2,197회 임무를 수행하며 437발의 폭탄을 투하했고 허미즈의 800대대는 14발의 AIM-9L을 쏴 12대를 격추하고 인빈서블의 801대대는 12발을 쏴 7대를 격추했다. 여기에 더해 3대를 ADEN 30mm 기관포로 격추하고 헬리콥터 1대를 기동으로 위협해 추락시켰다. 손실은 지대공미사일에 격추된 1대, 대공포에 격추된 1대, 구름 속에서 서로 부딪힌 2대, 밤에 비행착각 때문에 바다에 추락한 1대, 인빈서블의 비행갑판에서 미끄러져 바다로 떨어진 1대, 모두 6대였다. 가동률은 매우 높아 계획된 임무의 99%가 예정대로 수행되었고 각 기체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3번 출격했는데 6번까지 출격한 기체도 있다. 시해리어가 폭격 임무를 수행할 때는 1000파운드 폭탄을 3발까지 달고 출격했고 주로 dive 또는 toss 폭격을 실시했다. NAVHARS 항법장치에 입력한 좌표대로 날아가 레이더로 위치를 확인한 다음 표적을 눈으로 보지 않은 채로 구름 위에서 던지는 방법도 사용되었지만 명중률은 좋지 않았다.
시해리어 FA2의 개발
포클랜드전쟁에서 시해리어 FRS1은 미라지 IIIEA 전투기 1대, 대거A 전폭기 9대, A-4B/C 스카이호크 공격기 8대, 캔브라 B62 폭격기 1대, IA-58 푸카라 공격기 1대, 정찰 임무에 사용된 C-130E 수송기 1대, 그리고 헬리콥터 2대를 파괴했다. 그러나 조기경보기가 없어 엑조세 공대함미사일을 쏘고 도망가는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는 요격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사실 대부분의 격추는 영국군이 상륙한 해안 상공에 이미 침투한 대거A와 A-4B/C 스카이호크를 시해리어 조종사가 맨눈으로 찾아서 격추한 것이다.
실전에서 드러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1983년부터 <시해리어 FRS2>의 연구가 시작되고 1985년 1월 BAe는 2대의 FRS1을 FRS2 시험기로 개조하는 계약을 땄다. 조기경보기가 없었다는 문제 또한 시킹 HAS2 헬리콥터에 님로드 MR2 해상초계기의 서치워터 레이더를 달아 <시킹 AEW2A> 조기경보 헬리콥터로 만들어 해결했다. 이밖에 1985년 국방백서는 시해리어 FRS1이 WE177 핵폭탄을 운용할 수 있다고 밝혔고 같은 해 시이글 공대함미사일도 운용하기 시작했다. 시이글 공대함미사일이 실전배치되면서부터 인빈서블급 항공모함은 <사람이 탄, 다시 쓸 수 있는 토마호크>를 얻어 소련해군의 키에프급 항공모함에 맞먹는 대함공격력을 갖게 된다.
시이글 2발을 단 시해리어 FRS1
시해리어 FRS2의 가장 중요한 개선점은 능동레이더유도 중거리 공대공미사일 AIM-120A AMRAAM을 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를 위해 펄스-도플러 방식의 블루빅슨 레이더가 개발되었다. 펄스-도플러 레이더는 도플러 효과를 이용해서 상대속도가 0이 아닌 표적만 잡아내는 레이더이다. 펄스-도플러 레이더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볼 때 가만히 있는 지표면은 상대속도가 항상 0이기 때문에 펄스-도플러 레이더는 지표면에서 반사된 신호는 모두 무시하고 움직이는 표적만 잡아낸다. 이것이 바로 Look Down 능력이다. 블루빅슨은 이미 잡은 표적은 계속 추적하면서 새로운 표적을 찾는 공대공 Track While Scan도 가능해 10개의 표적을 추적하고 4발의 AMRAAM에 업링크 지령을 보낼 수 있다. 시해리어는 이제 훨씬 먼 거리에서 4개의 표적을 한꺼번에 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시해리어 FRS2는 1988년 9월 19일 처음으로 날고 1994년 형식명이 FA2로 바뀌어 1995년 실전배치된다.
발칸반도와 이라크
시해리어의 두 번째 전쟁터는 발칸반도였다. 영국정부는 UN의 결의에 따라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한 보스니아의 내전에 개입해 1993년부터 인빈서블급 항공모함 1척을 아드리아 해로 보냈다. 1993년 1월 아크로열이 처음으로 투입되었고 8월에는 인빈서블이 아크로열을 교체했는데 이 때 각 항공모함은 시해리어 FRS1을 6대 또는 7대씩 탑재했다. 시해리어의 임무는 비행금지구역 초계, 근접항공지원, 정찰이었고 대개 AIM-9M 사이드와인더 2발, 1000파운드 폭탄 1발, 보조연료탱크 2개를 달고 작전했다. 그런데 비행금지구역을 초계하다가 펄스-도플러 레이더와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이 있는 유고연방 세르비아의 MiG-29와 싸우게 되면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이 없는 시해리어 FRS1이 크게 불리했다. 따라서 시해리어는 상대속도가 0이 아닌 표적만 잡아내는 펄스-도플러 레이더의 특성을 이용하는 전술을 개발했다. 상대속도를 0으로 만들어 MiG-29의 레이더 스코프에서 잠시 사라지기 위해 수직으로 급강하하거나 MiG-29의 레이더 빔의 방향에 대해 직각으로 나는 것이다. 다행히 시해리어는 MiG-29와 한번도 마주치지 않아 실제로 이 전술을 쓸 기회는 없었다.
시해리어의 첫 정밀유도무기는 페이브웨이 II 레이저유도폭탄이었다. 시해리어는 이 폭탄을 1993년 7월부터 운용하기 시작했는데 레이저조사기가 없어 지상의 FAC요원이 표적을 레이저로 비춰주어야만 했다. 보스니아에서 시해리어가 처음으로 폭탄을 던질 기회는 1994년 2월 투즐라에서 UN군이 공격을 받았을 때였다. 이 때 정찰 임무를 수행하는 시해리어 2대가 표적을 찾고 또 다른 2대가 폭탄을 달고 출격해 실제로 폭격을 하지는 않았지만 하늘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공격을 멈추게 했다. 그러나 4월 16일 고라주데의 안전지대가 공격을 받아 근접항공지원을 위해 2대가 1000파운드 폭탄을 1발씩 달고 출격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이날 시해리어는 레이더로 거리를 재서 폭탄을 던지는 ASB3 모드를 써서 1000파운드 폭탄을 T-55 전차에 정확히 맞추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lock이 걸리지 않아 위험하게도 세 번째 시도를 하다가 1대가 SA-7 휴대용 지대공미사일에 맞아 격추당했고 탈출한 조종사는 SAS가 구출했다.
1995년부터는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가 6대의 시해리어 FA2를 싣고 아드리아 해로 출동했고 11월 보스니아 내전이 끝난 다음 1996년 미국에서 벌어진 <퍼플 스타> 훈련에서 시해리어 FA2는 F-15, F/A-18, F-16을 상대로 훈련을 기회를 가졌다. 이 훈련에서 시해리어 FA2는 공대공 TWS 모드에서 AMRAAM을 퍼부어 미국 전투기들의 허를 찔렀고 미국해병대의 장군으로부터 <the little puff-jet with the big radar>란 찬사를 받았다. 시해리어 FA2의 전술은 FRS1이 실전배치될 때의 <one up, one ready>로부터 완전히 바뀌어 이제는 4대가 함께 떠서 2대는 위쪽, 다른 2대는 아래쪽을 맡아 블루빅슨 레이더로 훑어 표적이 잡히는 대로 TWS 모드에서 AMRAAM을 퍼붓게 되었다.
이듬해 1997년 일러스트리어스는 페르시아만으로 가서 이라크 남부 비행금지구역 초계에 참가했고 1998년에는 인빈서블이 시해리어 FA2 8대, 공군 해리어 GR7 8대를 싣고 가서 미국해군의 항공모함 니미츠 및 조지 워싱턴과 함께 UN의 사찰을 거부하는 이라크를 압박했다. 이 때 인빈서블은 16대만으로 F-14와 F/A-18을 48대씩 싣는 니미츠와 조지 워싱턴을 합친 전체 임무 숫자의 1/3을 제공해 미국해군을 놀라게 했다. 1999년 다시 발칸반도의 코소보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 인빈서블은 이번에는 7대의 시해리어 FA2만 싣고 아드리아 해로 출동해 NATO군 전폭기를 호위했다. 그러나 이 때도 MiG-29를 상대로 블루빅슨 레이더와 AMRAAM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는 없었다. 이 무렵 시해리어 FA2에는 AN/URC-138 SHAR 터미널이 추가되어 링크16 데이터링크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다.
퇴역
2000년 4월 1일, 해외원정작전을 강조한 1998년의 <전략방위계획>에 따라 해군의 시해리어 FA2 전폭기 부대와 공군의 해리어 GR7 공격기 부대를 하나의 조직으로 합친 <조인트 해리어 포스>가 탄생했다. 이것은 1960년대 <East of Suez> 시절의 아이디어가 40년 지나 구체화된 것인데 2년도 지나지 않은 2002년 2월 28일 시해리어 FA2를 2006년에 퇴역시킨다는 발표가 나왔다. 조기퇴역의 결정적인 원인은 더 큰 레이더와 공대공미사일을 달아 무거워졌지만 엔진 추력은 그대로여서 페르시아만과 같은 더운 지역에서 수직 착함이 너무 위험해진 것이었다. 물론 시해리어 FA2의 엔진을 최신형 페가서스 Mk107로 바꾸면 되겠지만 적기와 공중전을 벌일 일이 거의 없을 방공전투기에 아까운 돈을 쓰지 말고 지상공격기에 쓰자는 의견을 꺾지 못했다. 이 결정에 따라 시해리어 FA2는 지난 3월 31일 모두 퇴역했고 해군 800대대와 801대대는 올해 안에 모두 원래 공군소속이었던 해리어 GR7을 운용하는 지상공격기 부대로 다시 태어난다.
시해리어 FA2의 조기퇴역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수직이착륙기는 아무리 좋은 레이더와 무기체계를 갖추고 있더라도 엔진 추력이 중량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면 운용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거워지면 보통 전투기는 속도와 가속성이 떨어지는 정도로 끝나겠지만 수직이착륙기는 가장 중요한 수직착륙을 못하게 되어 치명적이다. 앞으로 F-35B의 성공 여부는 엔진 추력과 중량의 씨름에 달려있다. 마지막으로 1979년 시해리어 FRS51을 주문해 1983년 실전배치한 인도해군은 블루폭스를 이스라엘제 EL/M-2032 레이더로 바꾸고 역시 이스라엘제인 더비 중거리 공대공미사일을 달아 당분간 계속 운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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