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스크랩]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헤즈볼라의 탄생 배경

Humancat 2014. 7. 31. 10:57

지난 7월 12일 남부 레바논의 시아파 회교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북부 이스라엘 침투 공격으로 시작된 34일간의 전쟁은 양쪽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유엔의 정전결의안에 따라 8월 14일 멈추었다. 이번 전쟁의 원인과 진행, 결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즈볼라가 어떻게 해서 생겨난 조직인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벌어진 레바논 내전과 1982년 6월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를 내쫓기 위해 침공을 감행한 이스라엘의 <갈릴리의 평화> 작전을 알아야 한다.

                    

레바논은 고대 지중해의 해양민족 페니키아인의 고향이었고 기원 후에는 기독교가 포교되어 6세기부터 마론파 기독교도가 많이 살았다. 7세기에는 회교도들이 레바논과 시리아를 정복했고 십자군전쟁 때는 다시 기독교도들이 레바논을 정복해 기독교 왕국이 잠시 있다가 1500년대부터는 오토만 터키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레바논은 이렇게 중동에서 기독교의 세력이 꽤 오래 버틴 곳이어서 다른 지역과 달리 마론파 및 그리스 정교회 기독교도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1860년에 회교의 분파인 드루즈교도에 의한 기독교도 학살 사건이 터져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군대를 보내 개입했다. 종교 갈등으로 인한 내전과 외국의 무력 개입은 115년 지나 1975년에도 그대로 반복된다.

                

             

1914년에 터진 제1차 세계대전에 오토만 터키 제국이 독일의 편이 되어 참전하자 오래 전부터 중동의 터키 영토를 노리던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인의 반란을 부추겼고 1917년 12월 영국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1918년 9월에는 아랍 반란군과 함께 지금의 레바논과 시리아 지역을 점령했다. 오토만 터키 제국이 패망하고 이제 레바논과 시리아 지역을 손에 넣게 된 영국과 프랑스는 직접적인 식민통치는 아니지만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라는 간판을 내세우고 영국은 지금의 이스라엘과 요르단, 프랑스는 지금의 레바논과 시리아를 갖게 되었다.

               

이때 이들은 원래의 오토만 터키 제국 행정구역을 따라 <대 시리아, Greater Syria>를 만들지 않고 레바논과 시리아를 지금처럼 나누었는데 이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통치를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레바논이란 나라를 굳이 따로 만들 것이라면 차라리 마론파 기독교도들이 많이 사는 베이루트 북쪽 지방만 떼어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더라면 종교 갈등으로 인한 내전의 소지를 크게 줄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론파 기독교도만의 기독교 국가는 너무 작아 독자 생존이 어렵다며 그리스 정교회 기독교도, 수니파 회교도, 시아파 회교도, 드루즈교도들이 사는 지역도 붙이되 마론파 기독교도가 수적 우위를 갖도록 국경을 그어 지금의 레바논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강대국들이 마음대로 국경을 그어 만든 레바논과 시리아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패망한 다음부터 독일의 꼭두각시인 프랑스의 Vichy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그런데 이 Vichy 정부가 독일이 이라크의 反영국 쿠데타를 지원하기 위해서 레바논과 시리아를 통해 독일공군부대를 보내는 것을 허락하자 영국이 움직여 1941년 Vichy 정부를 몰아냈다. 영국으로부터 레바논과 시리아를 넘겨 받은 자유 프랑스 정부는 1943년 레바논을 독립시켰고, 레바논 정부는 기독교도와 회교도가 인구 비례에 따라 권력을 나눠 갖는 형태로 조직되어 레바논의 <국가 협약>은 비록 성문법은 아니지만 대통령은 마론파 기독교도, 총리는 수니파 회교도, 국회의장은 시아파 회교도가 맡도록 했다.

               

이후 레바논은 잠시나마 번영해 수도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1958년 6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이 지원하는 회교도 단체들이 차모운 대통령을 끌어내리려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에 차모운 대통령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해 7월 14,000명의 미국 해병대와 육군 병력이 레바논으로 출동했고 폭동이 가라앉은 다음 10월에 철수했다. 레바논은 1958년의 위기를 거친 다음 1960년대에는 비교적 평온하게 번영했고 이스라엘이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한꺼번에 상대한 1967년의 6일 전쟁에도 레바논은 말려들지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으로 몰려들면서 무장조직인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까지 같이 들어왔고 이들은 레바논이란 나라를 송두리째 흔들게 된다.

                 

PLO는 1968년부터 남부 레바논과 북부 이스라엘 국경 지대를 장악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레바논 정부군은 이때부터 이스라엘과의 국경 지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PLO가 공격하면 빠짐 없이 보복을 감행해서 1968년 12월 26일 PLO가 베이루트에서 그리스의 아테네로 가는 이스라엘의 엘알 항공 여객기를 납치하자 이스라엘은 이틀 후 특수부대 사에렛 마트칼을 베이루트 국제공항으로 보내 여객기 13대를 폭파했다. 레바논은 이렇게 PLO와 이스라엘의 싸움에 말려들어 얼떨결에 뺨을 맞았는데, 참고로 이 작전에는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이스라엘의 총리였고 지금 야당의 총리 후보인 비냐민 네탄야후가 사에렛 마트칼 대원의 한 명으로서 참가하기도 했다.

                 

1969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레바논 국내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사실상의 자치권을 주도록 레바논 정부를 강요해 <카이로 협정>을 맺게 했고 이어 1973년의 <멜카트 협정>은 레바논 국내에서 PLO가 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권리를 정식으로 주고 남쪽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을 허용했다. 카이로와 멜카트 협정에 의해 PLO는 레바논에서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처럼 된 것이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PLO가 자국 내에서 무장하고 행패를 부리는 것을 보다못해 1970년 9월 군대를 동원해 치열한 전투 끝에 PLO를 전부 내쫓았다. PLO를 무력으로 내쫓은 요르단은 주권을 지킬 수 있었지만 기독교도와 회교도의 인구 비례에 따라 권력을 나눠 가지는 바람에 PLO를 내쫓을 만큼 정부가 강력하지 못했던 레바논은 곧 PLO에 의한 내전에 휘말리고 만다.

                  

대부분이 수니파 회교도였던 PLO는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댄 남부 레바논에 기지를 두었고 레바논 남부의 주민은 대부분 수니파가 아닌 시아파 회교도였다. PLO는 남부 레바논을 사실상 PLO의 영토처럼 만들며 시아파 회교도 주민들에게 많은 행패를 부렸고 PLO에 대한 시아파 회교도 주민들의 태도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초기에 아주 잘 드러난다. 레바논 정부와 군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PLO에 대응해 레바논의 각 정파는 민병대를 조직했고 1975년 4월 13일 PLO 대원들이 마론파 기독교도 민병대의 우두머리 피에르 제마엘의 암살을 시도하면서 1990년까지 15년에 걸친 내전이 시작되었다.

              

레바논 내전은 마론파 기독교도 민병대, PLO, 드루즈 민병대, 수니파 회교도 민병대 등이 서로 싸우며 상대방 주민들이 많이 사는 도시와 마을을 포위하고 학살하는 끔찍한 <인종청소> 전쟁이 되어 버렸고 1976년 수세에 몰리던 마론파 기독교도는 남쪽의 이스라엘과 동쪽의 회교국 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은 PLO가 레바논의 주인이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1976년 5월부터 마론파 기독교도 민병대에 무기를 제공했고, 이스라엘의 적국인 시리아 역시 레바논에 <PLO 국가>가 생겨 자신의 말을 듣지 않게 될 것을 우려해 기독교도의 편을 들게 되었다. 레바논으로 진격한 시리아군은 PLO와 회교도 민병대의 저항을 간단히 물리치고 마론파 기독교도 민병대와 힘을 합쳤고 1976년 10월 아랍 연맹의 회의에서 시리아는 4만 명의 군대를 레바논에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시리아군의 개입 덕분에 레바논 내전은 일단 진정이 되었지만 남부 레바논은 여전히 PLO가 장악하고 있었다. PLO는 1978년 3월 11일 11명의 대원을 이스라엘 북부로 침투시켜 버스 2대를 납치해 37명의 이스라엘인을 죽였고 여기에 대한 보복으로 3월 15일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을 침공했다. 이것이 <리타니 작전>이고 이스라엘의 첫 레바논 침공이다. 이스라엘군은 남부 레바논의 리타니 강까지 진격해 PLO를 잠시나마 남부 레바논에서 내쫓았지만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425호에 따라 1978년 하반기에 레바논에서 물러났다. 이스라엘군이 떠난 자리에는 UN이 보낸 <UNIFIL, UN Interim Force in Lebanon>이 배치되었는데 이스라엘은 떠나면서 국경에서 북쪽으로 12km까지의 레바논 영토를 <안전지대>로 설정하고 여기에 기독교도와 시아파 회교도로 구성된 민병대 <남레바논군 SLA>를 만들어 배치했다. 남부 레바논 주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시아파 회교도는 이스라엘이 만든 SLA에 지원할 정도로 수니파 회교도가 대다수인 PLO와 사이가 나빴지만 1982년 이스라엘의 두 번째 레바논 침공이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그 동안 시리아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던 바시르 제마엘의 마론파 기독교도 민병대는 시리아가 다른 기독교도 지도자를 밀자 시리아와의 관계가 나빠졌다. 바시르 제마엘은 대신 이스라엘에 접근했고 1981년 4월 마론파 기독교도 민병대와 시리아군이 중부 레바논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기독교도 주민의 도시 Zahle를 놓고 싸울 때 드러내놓고 이스라엘의 개입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은 바시르 제마엘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전투기가 출동해 시리아군 헬리콥터 2대를 격추시키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시리아군은 SAM 포대를 동부 레바논의 베카 계곡에 배치했다. 마침 이스라엘은 메나헴 베긴이 총리로 재집권하고 1973년 욤키푸르 전쟁의 영웅 아리엘 샤론이 국방장관이 되었다. 남부 레바논을 본거지로 삼고 북부 이스라엘에 로켓을 쏘는 PLO와 절대 타협은 없다는 초강경파인 이들은 1981년 11월부터 레바논의 PLO를 완전히 끝장내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웠다. 바로 레바논을 다시 침공해 PLO를 최후의 한 명까지 다 내쫓고, 더 나아가 마론파 기독교도의 우두머리 바시르 제마엘을 대통령으로 세워 레바논을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웃나라를 뒤집어 엎고 마음에 드는 정파를 지배세력으로 세운다는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이 작전은 나중에 이스라엘 국내에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다시 침공할 준비를 갖추고 있던 1982년 6월 3일, PLO에 속하지 않은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인 아부 니달 조직이 런던에서 주영 이스라엘 대사의 암살을 시도했다. 레바논에 있는 PLO를 공격할 구실을 찾고 있던 이스라엘은 PLO가 했건 아부 니달이 했건 상관 없이 공군 전폭기를 동원해 서부 베이루트의 PLO 건물을 폭격했고 PLO는 여기에 대한 보복으로 이틀 동안 북부 이스라엘에 로켓을 퍼부었다. 드디어 이스라엘이 두 번째 레바논 침공을 감행할 확실한 구실이 마련되자 이스라엘은 양쪽의 적대행위 중지를 요구한 6월 5일의 UN 결의안 508호에 아랑곳하지 않고 6월 6일 35,000명의 병력과 1,240대의 (어떤 자료에서는 800대라고도 한다) 전차를 동원해 레바논 침공을 감행한다. UNIFIL은 바로 이런 사태를 막도록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국경 지대에 배치되었지만 기관총에 장갑차 정도의 무장만 갖춘 경무장 병력이어서 아무 것도 못하고 그냥 힘 없이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UN 초소 옆을 지나는 이스라엘군 메르카바 전차 대열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으로 진격하자 그 동안 수니파 회교도 PLO에게 시달렸던 시아파 회교도 주민들은 이스라엘군을 환영했고 PLO를 상대로 싸우던 시아파 회교도 민병대 아말의 지휘관은 휘하 병력에게 이스라엘군과 싸우지 말고 이스라엘군이 무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면 주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오랫동안 자신들을 괴롭힌 PLO를 이스라엘이 두들기는 것을 묵인한 것이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 자리 잡은 PLO 부대를 소탕할 때는 이스라엘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이스라엘군의 진격은 대체적으로 순조로웠다. 그러나 국경으로부터 40km 정도까지만 신속히 진격한다는 원래의 계획은 처음부터 딴 생각을 품고 있던 샤론 국방장관에 의해 계속 바뀌어 이스라엘군은 리타니 강 너머로 깊숙이 진격했고 곧 중부 레바논에서 시리아군과 맞붙게 되었다.

          

 


레바논 국기를 단 이스라엘군 APC를 환영하는 남부 레바논 주민들

               


이스라엘군 차량 행렬

                                

처음에는 이스라엘과의 싸움을 피했던 시리아는 이스라엘이 베이루트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를 잇는 고속도로를 끊으려 하자 적극적으로 맞싸워 <아인 제할타>에서 이스라엘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아인 제할타>에서 막힌 이스라엘군은 항공지원을 요청했고 이를 위해서는 베카 계곡에 배치된 시리아군의 SAM 포대가 먼저 제거되어야 했다. 이에 이스라엘공군은 F-4와 크피르 전폭기를 보내 시리아군의 19개 SAM 포대를 차례로 파괴했고 시리아공군의 MiG-21과 MiG-23 전투기가 출격해 SAM 포대를 지키려 했지만 이스라엘공군의 최신형 F-15와 F-16 전투기는 손실 없이 80여대를 격추시키는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항공전에서는 일방적으로 졌지만 시리아군은 지상전에서는 매복과 방어 전투에서 1973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였고 물러날 때도 무질서한 패주가 아니라 질서 있게 후퇴를 실시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휴전하기로 합의한 6월 11일, 이스라엘군의 한 기갑대대는 <술탄 야콥>에서 시리아군의 매복에 걸려 당시 가장 소중한 군사 기밀이었던 블레이저 반응장갑을 단 M48 패튼 전차 8대를 잃은 채로 겨우 탈출했고 이어 들이닥친 시리아군은 곧바로 이스라엘군의 매복에 걸려 당시 가장 최신형이었던 T-72 전차 9대를 순식간에 잃고 말았다. 이스라엘군과 시리아군의 전투는 일단 이 상태로 멈추었는데 이 때 이스라엘군은 베이루트-다마스커스 고속도로를 끊고 베이루트를 포위한 상태였다. 남부 레바논에서 쫓겨 온 PLO 대원 14,000명과 시리아군 85여단이 민간인 50만 명과 함께 베이루트에 갇히게 되었을 때 베이루트-다마스커스 고속도로 주변 알레이에서는 시아파 회교의 종주국 이란에서 보낸 혁명수비대원이 이스라엘군에 자살공격까지 감행했다. 이들이 바로 앞으로 등장할 시아파 회교도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전신이다.

          


술탄 야콥에서 격파된 시리아군 T-62

                 


술탄 야콥에서 시리아군이 노획해 다마스커스로 끌고 가 전시한 M48

                   

이스라엘군은 베이루트를 포위한 채 7월 내내 엄청난 포격과 폭격을 가했고 베이루트 시내는 서서히 2차대전 당시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처럼 폐허로 변해갔다. 이 때 베이루트 공격은 너무나 많은 시민들의 희생을 초래한다며 공격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이스라엘군 211여단장 엘리 게바 대령이 보직 해임되는 일이 벌어졌고 이스라엘 국내에서는 반전 시위가 일어났다. 드디어 8월 4일, 이스라엘군은 베이루트 시내로 진입을 시작했고 점점 조여오는 포위망에서 버티던 PLO는 결국 8월 19일 미국의 중재에 따라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군으로 이루어진 다국적군의 보호를 받으며 제3국으로 떠나는 것에 합의했다. 이틀 후 8월 21일 다국적군이 베이루트에 상륙했고 이로부터 12일 동안 PLO와 시리아군 14,398명은 PLO는 배를 타고 자신들을 받아주겠다는 아랍국가로, 시리아군 85여단은 다시 열린 베이루트-다마스커스 고속도로를 통해 시리아로 떠났다.

            

                 

베이루트 시내에서 불타는 메르카바 Mk1

                           

이로서 이스라엘은 368명의 전사자와 40대의 (피격된 숫자는 130대) 전차를 잃고 PLO를 레바논에서 내쫓는다는 목표를 일단 달성하긴 했지만 대신 PLO보다 더 무서운 적을 만들어버렸다. 이스라엘군과 PLO의 전투를 피해 베이루트로 피난한 시아파 회교도들은 이스라엘군이 1978년과 달리 수도 베이루트까지 쳐들어가 베이루트를 폐허로 만들자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게다가 10월 17일에는 종교 행사 중인 시아파 회교도 군중들이 이스라엘군 호송대를 막자 이스라엘군이 발포하는 불행한 사태까지 터졌다. 처음에는 이스라엘군을 환영했던 시아파 회교도들은 이렇게 피해를 입고 이스라엘군의 침공 목적이 레바논에서 PLO를 내쫓고 그 자리에 시아파 회교도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마론파 기독교도가 권력을 잡은 괴뢰국가를 세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자 이스라엘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해방군으로 환영 받았으나 곧 침략군으로 인식이 바뀌어 싸워 몰아내야 할 존재가 된 것이다.

                   

마론파 기독교도 바시르 제마엘을 레바논의 대통령으로 세우려고 레바논을 침공했던 이스라엘은 이렇게 시아파 회교도의 지지를 잃었고 9월 14일 또 한번 좌절을 맛본다. 바시르 제마엘이 암살된 것이다. 지도자를 잃고 분노한 마론파 기독교도 민병대는 사브라와 샤틸라의 두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서 PLO를 소탕하겠다며 이스라엘군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서는 PLO를 소탕하기는커녕 약 800명의 난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웃나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려고 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성공해도 정치적, 그리고 도의적으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신속하게 끝내겠다던 레바논 침공은 2000년 5월까지 무려 18년을 끄는 <이스라엘의 베트남전쟁>이 되어버린다.

                

국제사회의 엄청난 비난을 받은 이스라엘은 베이루트에서 이스라엘군을 철수시켰고 대신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다국적군이 베이루트에 배치되었는데 1983년 4월 18일 미국대사관이 폭탄공격을 받고 63명이 죽는 사건이 터졌다. <지하드 알 이슬람>이라는 시아파 회교도 무장단체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이것은 폭탄을 실은 트럭을 몰고 돌진하는 자살공격의 시작이었다. 이어 8월에 이스라엘군이 중부 레바논에서 철수하자 이 빈 자리를 놓고 미국이 무장시킨 새로운 레바논 정부군과 드루즈 민병대가 싸웠고 미국은 전함 뉴저지를 보내 16인치포로 함포사격을 하며 레바논 정부군을 지원했다. 이제 미국은 드루즈와 시아파 회교도를 포함한 레바논의 각 정파에게 이스라엘과 똑 같은 침략자로 보이기 시작했고 10월 23일 폭탄을 실은 트럭이 베이루트의 미국해병대 사령부로 돌진해 241명을 죽이고 같은 시각 또 다른 폭탄 트럭이 프랑스군 사령부로 돌진해 58명을 죽였다. 이 두 자살공격 역시 시아파 회교도의 <지하드 알 이슬람>이 한 것이었다. 이들은 11월 4일에는 남부 레바논의 항구 도시 티레의 이스라엘군 사령부를 같은 방법으로 폭파해 23명을 죽였다. <지하드 알 이슬람>은 자살폭탄공격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레바논 땅을 밟은 외국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혀 결국 다국적군은 1984년 3월 레바논을 떠나고 말았는데 시리아군만은 이런 공격을 받지 않았다. 이들이 시리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는 단체였기 때문이다. <지하드 알 이슬람>은 곧 등장하는 헤즈볼라의 일부가 된다.

                   

헤즈볼라가 언제 생긴 단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란에서 돌아온 시아파 회교 성직자가 1978년 베카 계곡에 있는 도시 바알벡에서 이 단체를 만들었다는 견해가 있지만 이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린 것은 1985년 2월 16일이다. 이날 헤즈볼라가 발표한 3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첫째 레바논에서 모든 서방 세력을 내쫓고, 둘째 여러 종교를 혼재한 레바논을 이란을 본떠 회교신정국가로 만들며, 셋째 이스라엘이란 나라 자체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헤즈볼라는 1979년 팔레비 국왕을 내쫓고 회교 성직자가 권력을 휘두르는 회교신정국가가 된 이란의 지원을 받고 성장해 1974년대에 생긴 시아파 회교도 민병대 아말과 세력을 다투게 되었는데, 이 두 단체의 차이는 헤즈볼라는 회교신정국가를 만들겠다는 회교근본주의를 지향하지만 아말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것이다. 헤즈볼라와 아말은 1988년부터 서로 병력을 동원해 싸우기 시작해 1989년에는 아말이 잠시나마 남부 레바논을 장악했다. 지금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의 형은 아말에 속해 있었고 형과 동생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은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듬해 1990년, 15년에 걸친 레바논 내전은 일단 끝이 났다. 레바논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시리아는 헤즈볼라 하나만 남겨두고 다른 모든 민병대의 무장을 해제시켰는데, 헤즈볼라만 남겨둔 이유는 이들을 남부 레바논의 일부를 안전지대라며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군을 몰아낼 수단으로 쓰기 위한 것이었다. 헤즈볼라의 모델인 이란은 헤즈볼라에게 끊임없이 물자를 보냈고 이것은 대부분 시리아를 거쳐 시리아-레바논 국경을 넘어서 육로로 왔다. 따라서 시리아는 이란에서 남부 레바논으로 이어지는 헤즈볼라 보급로의 목줄을 쥐었다고 할 수 있다. 헤즈볼라는 1990년대 내내 남부 레바논의 이스라엘군과 이스라엘이 만들어 무장시킨 SLA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고 이스라엘군은 이에 대응해 안전지대에 철조망을 치고, 지뢰를 묻고, 수백 미터마다 초소를 세워 그 사이를 센튜리언 전차의 포탑을 떼고 개조한 중장갑 APC로 순찰하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이스라엘군은 <표적 암살>이라는 새로운 방법도 써서 1992년 2월 16일 이스라엘공군의 AH-64A 아파치 헬리콥터가 헤즈볼라의 지도자 아바스 무사위가 탄 차를 헬파이어 미사일로 맞춰 그를 죽였다. 아바스 무사위의 후계자가 바로 지금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이다. 하산 나스랄라가 이끄는 헤즈볼라는 남부 레바논에서 끈질기게 이스라엘군과 싸웠고 인구 600만의 이스라엘에서는 비록 소규모지만 계속 사상자가 발생하자 남부 레바논에서 철수하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스라엘군이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할 때 육군소장으로서 침공부대 부사령관을 맡았던 에후드 바라크 총리는 결국 2000년 5월 남부 레바논에서 이스라엘군을 모두 철수시켜 1978년의 UN 결의안 425호를 무려 22년 지나서야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이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골란 고원의 <쉐바 농장>이 시리아 땅이 아니라 레바논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투쟁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2000년 10월 7일 이스라엘군 차량을 공격해 부상자 3명을 잡아갔다. 이스라엘은 여기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고 잡혀간 이 3명은 2004년의 수감자 교환에서 시체로 돌려받는다. 헤즈볼라와 이스라엘군의 충돌은 국경 지대에서 쭉 계속되었고 2004년 9월 2일의 UN 결의안 1559호는 레바논의 모든 민병대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이 <쉐바 농장>을 점령하고 있는 한 UN 결의안 425호를 지킨 것이 아니라며 1559호를 무시했음은 물론이다. 헤즈볼라는 특공대를 이스라엘 국내로 침투시켜 이스라엘군 병사를 잡아와서 이스라엘이 감금하고 있는 수감자들과 맞바꾸는 작전을 계속하기 위해 이란과 시리아로부터 새로운 무기도 들여왔다. 바로 12,000발에 달하는 로켓인데, 이스라엘 북부와 중부 지역까지 사정거리에 넣어 헤즈볼라의 침투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규모 보복을 막을 <전략적 억지력>으로서 쓰겠다는 것이다. 헤즈볼라는 또한 남부 레바논 일대에 벙커와 터널을 구축했고 이란과 시리아를 통해서 수천 발의 대전차 미사일을 들여왔다.

              

1982년 국방장관으로서 레바논 침공의 주동자였던 아리엘 샤론은 2001년 3월 에후드 바라크에 이어 총리가 되었고 헤즈볼라와의 충돌을 애써 무시했다.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과 싸우느라 바쁜데 굳이 북쪽에 제2전선을 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샤론 총리는 2005년 12월 병으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고 군에서 지휘를 맡아본 경험이 없는 부총리 에후드 올메르트가 올해 4월부터 총리가 되었다. 둘 다 육군소장이었던 에후드 바라크와 아리엘 샤론이 총리일 때 별다른 보복 공격을 받지 않아 대담해진 헤즈볼라는 7월 12일 다시 한번 특공대를 보내 이스라엘군 험비 2대를 공격해 3명을 죽이고 부상자 2명을 잡아갔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메르카바 Mk2 전차가 황급히 국경을 넘어 쫓아갔지만 길가에 묻힌 폭탄에 완전히 파괴되어 승무원 4명이 죽었고 또 다른 1명이 죽었다. 하룻동안 8명이 전사하고 2명이 납치되는 피해를 입은 이스라엘군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염두에 두고 6월부터 준비한 시나리오대로 보복 작전을 시작한다. 먼저 1주일 동안 공군기와 포병으로 헤즈볼라를 두들기고 그 다음 3개 사단이 국경을 넘어 진격해 4주일 동안 남부 레바논에서 헤즈볼라를 소탕한다는 작전이었다.

                 

너무 과도한 보복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올메르트 총리는 강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헤즈볼라와 그 후원자인 시리아와 이란이 이스라엘이 약해졌다고 생각할 것이고, 따라서 이번에 헤즈볼라의 군사력을 파괴하고 시리아와 이란에게 <이스라엘을 건드리면 이렇게 두들겨 맞는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며 작전을 강행했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에서 F-4E 팬텀II 전투기를 몰며 MiG-21 전투기 3대를 격추한 조종사였고 공군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이스라엘군 총참모장이 된 댄 할루츠 중장은 1999년 코소보에서 유고연방군을 몰아낸 NATO의 항공작전처럼 헤즈볼라 또한 공군력으로 해치울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며 작전을 지휘했다. 전쟁의 첫날 7월 12일 이스라엘공군의 F-15I 전폭기들은 39분만에 헤즈볼라의 장거리 로켓 발사기 54개를 파괴하며 기세를 올렸지만 헤즈볼라 또한 이스라엘 북부 도시에 로켓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어 F-16을 주축으로 한 이스라엘공군의 전폭기들이 7월말까지 4,500회 출격하고 AH-64 아파치 헬리콥터들이 700회 출격해 남부 레바논과 베이루트의 헤즈볼라 시설을 폭격했다. 폭격은 헤즈볼라가 잡아간 이스라엘군 2명을 시리아로 빼돌리지 못하게 도로와 교량을 끊는 것부터 시작해 헤즈볼라의 지휘소 타격으로 확대되었는데, 베이루트의 한 헤즈볼라 벙커는 F-16 전폭기들이 거의 동시에 23톤의 폭탄을 퍼부었지만 파괴되지 않았다고 한다. 주목할만한 사례로는 사거리가 200~250km에 달한다는 이란이 만든 <젤잘2> 로켓을 나르던 트럭을 무인정찰기가 잡아내고 그 영상을 실시간으로 전폭기에게 보내서 트럭을 파괴한 것이 있다.

                 

그런데 헤즈볼라는 아파트 단지의 주차장에서 로켓을 쏘기도 하고 지휘소를 민간인 거주 지역 안에다가 두어 이스라엘공군 전폭기가 여기를 폭격하면 거의 항상 민간인 사상자가 생겼고 이것은 헤즈볼라에게 아주 좋은 선전거리가 되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도로와 교량을 끊고 항구를 봉쇄하면 레바논 국민들이 이스라엘에게 싸움을 건 헤즈볼라를 비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학생이 잘못을 저지르면 그 학생의 반 전체에게 벌을 주어 다시 잘못하지 않게 한다는 집단 체벌의 논리이지만 그 벌이 너무 가혹하면 오히려 반 전체의 반발만 불러 일으킨다. 결국 이스라엘의 희망과 달리 실제로 벌어진 일은 레바논 국민 전체의 반발이었다. 이스라엘공군은 7월 12일부터 33일간 15,500회 출격해 7,000개의 표적을 타격했고 126개의 로켓 발사기를 파괴했다. 끊긴 도로와 교량은 각각 74개와 146개인데 대부분 남부 레바논에 집중되어 있고 레바논 민간인 사망자는 약 900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맞서 헤즈볼라는 모두 3,970발의 로켓을 이스라엘에 쐈고 이스라엘의 민간인 사망자는 41명이다.

                  

이스라엘공군은 레바논을 폭격하며 사고로 4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먼저 7월 19일 최신형 F-16I 수파 전폭기가 이륙하다가 타이어가 터져 추락했는데 조종사와 WSO는 무사히 탈출했고, 다음날 작전을 마치고 돌아오던 AH-64A 아파치 2대가 서로 부딪혀 1명이 죽고 3명이 다쳤다. 7월 24일에는 AH-64D 아파치 1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로터가 떨어져나가 타고 있던 2명이 죽었다. 추락 원인에 대해 처음에는 이스라엘육군이 그 지역에서 쏘던 MLRS에 맞은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지만 정말로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

              

레바논의 항구를 봉쇄하던 이스라엘해군의 <Saar 5>형 초계함 하니트는 7월 14일 베이루트에서 약 16km 떨어진 해상에서 작전 중에 헤즈볼라가 쏜 지대함 미사일에 맞아 4명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하니트를 때린 미사일은 중국제 C802를 이란이 베낀 <Noor> 미사일로 추정되고, 모두 2발이 발사되어 1발은 해안에서 60km 떨어져 있던 화물선을 맞춰 침몰시켰고 다른 1발은 하니트를 맞췄다. 하니트는 헬리콥터 비행갑판이 있는 배의 끝부분에 미사일을 맞아 침몰을 피할 수 있었는데, 하니트는 마침 주변에 이스라엘공군 전폭기가 작전 중이고 게다가 헤즈볼라에게 지대함유도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 함대공 방어 체계를 꺼두고 있었다. 이스라엘군 총참모부는 헤즈볼라가 <Noor>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작전하라고 해군에게 경고했지만 해군은 이 경고를 무시해서 하니트가 당했고, 대조적으로 공군은 헤즈볼라에게 SA-18 지대공 미사일이 있다는 경고를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작전했다.

                    

공군기의 폭격과 포병의 포격만으로는 헤즈볼라의 로켓 공격을 막지 못하자 이스라엘군은 전쟁의 셋째 주부터 본격적인 지상작전을 시작했다. 2개 여단이 각각 <마룬 알-라스>와 <빈트 즈베일>로 진격해 들어갔는데 <빈트 즈베일>에서 이스라엘육군의 최정예부대인 골라니 여단이 큰 피해를 입었다. 7월 25일 새벽, 골라니 여단 병사들은 <빈트 즈베일>의 거리로 진입해 조심스럽게 전진하다가 헤즈볼라 대원들을 맞닥뜨리고 총격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헤즈볼라 대원들은 건물의 위층에 있어 골라니 여단 병사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고 순식간에 51대대 C중대의 1/3인 30명이 피격되었다. 곧 다른 중대들이 달려와 C중대를 구했지만 C중대장 로니 클라인 소령은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수류탄에 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했고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의 전사자는 8명, 헤즈볼라의 전사자는 약 20명이었다.

                 

넷째 주에 들어서는 3개 사단이 레바논으로 들어갔지만 헤즈볼라의 가장 바깥쪽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고전했고 8월 12일에는 이날 격추된 CH-53 수송 헬리콥터의 탑승원 5명을 포함해서 하루 동안 24명이 전사하는 최대의 피해를 입었다. 이스라엘 신문들의 보도에 따르면 이 때의 전투는 전차로 여러 겹의 방어망을 뚫다가 많은 손해를 본 독일군의 1943년 쿠르스크 전투와 비슷했다. 헤즈볼라는 대전차 미사일을 이스라엘군 보병이 들어가 있는 건물에 쏘거나 산을 타고 이동 중인 대열에 쏴서 많은 피해를 입혔고, 이는 기껏해야 RPG-7로 무장한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상대로 싸울 때 쓰던 주요 건물을 하나하나 장악하는 전술을 건물 자체를 부숴버릴 수 있는 대전차 미사일을 가지고 있는 헤즈볼라에게 잘못 적용한 결과이다.

              

전쟁의 막판인 8월 13일에 끝난 <와디 살루키> 전투는 잘못된 전쟁 지도의 축소판과도 같았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육군 401여단은 24시간만 지나면 휴전이 시작되고, 휴전이 되면 철수해야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헤즈볼라가 지키고 있는 딱 하나 기동이 가능한 길로 진격했다. 최신형 메르카바 Mk4도 포함한 24대의 메르카바 전차들은 빗발치는 대전차 미사일을 무릅쓰고 언덕을 기어오르다 11대가 피격되었고 전차병 8명과 보병 4명이 전사했다. 헤즈볼라의 전사자는 약 80여명이었다. 이 부대는 일주일 동안 두 번 명령을 받고 두 번 다 명령이 취소된 다음, 곧 철수해야만 하는 지역을 장악하라는 명령을 다시 받고 공격에 나서 의미 없는 희생을 한 것이다.

             

33일간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 전사자는 모두 119명이고 헤즈볼라의 전사자는 약 500명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 신문 Globe의 8월 30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번 전쟁에 투입된 약 400대의 메르카바 전차 중에서 맞고 조금이나마 부서진 메르카바는 모두 52대이다. 자세한 내역을 알아보면 50대는 대전차 미사일에 맞았고 2대는 길가에 묻힌 폭탄에 당했는데 52대 중의 18대는 가장 최신형인 메르카바 Mk4이다. 대전차 미사일에 맞은 50대의 메르카바 중에서 8대가 맞고도 멀쩡했지만 5대는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고, 길가에 묻힌 폭탄에 당한 1대의 메르카바 Mk2와 1대의 Mk4 또한 다시 쓸 수 없다고 한다.

                

메르카바 Mk4는 차체 아래에도 장갑이 두터워 사망자는 1명뿐이었다고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7월 12일 침투한 헤즈볼라 특공대에 잡혀간 병사 2명을 구출하기 위해 급히 국경을 넘어간 메르카바 Mk2는 길가에 묻힌 폭탄에 완전히 파괴되어 4명의 승무원이 모두 사망했다. 그러나 메르카바 Mk2는 2005년 11월 <쉐바 농장>에서는 헤즈볼라가 쏜 대전차 미사일 7발을 맞고도 승무원이 모두 무사한 방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대전차 미사일에 맞은 메르카바 22대는 장갑이 뚫려 23명의 승무원이 전사했다. 전사한 23명 중의 18명은 5대의 메르카바에 타고 있었고 18명의 절반은 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던 <와디 살루키> 전투에서 전사했다. 메르카바 전차는 4명의 승무원뿐만 아니라 보병도 태우고 있었던 경우가 많았고 그에 따라 인명피해도 늘었다.

                

보도에 따르면 헤즈볼라는 <kill box>를 정해 두고 여기에 이스라엘군이 들어오면 하나의 표적에 여러 발의 대전차 미사일을 한꺼번에 쏘는 전술을 썼다고 한다. 게다가 이스라엘군 보병의 기관총 사거리 밖인 3,000미터 거리에서부터 대전차 미사일을 쏴 전차와 보병의 분리를 시도했고, 전차는 보병의 엄호 없이 혼자 돌격하면 필연적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 메르카바의 장갑을 뚫은 대전차 미사일은 러시아제 코넷E, 메티스M, 콘쿠르, RPG-29 등으로 추정되고, 피격된 메르카바를 끌고 와서 자세히 조사한 결과 헤즈볼라가 메르카바의 약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이스라엘군은 결론을 내렸다. 대전차 미사일의 위협에 대해 이스라엘군이 가만히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4대의 메르카바 Mk4에 트로피 능동방어시스템을 설치했고 이 4대는 대전차 미사일에 피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전쟁은 UN 결의안 1701호에 따라 일단 끝났지만 레바논 정부군은 여전히 허약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주도하는 UNIFIL 증원부대가 UN 결의안 1559호에 따라 헤즈볼라의 무장해제를 시도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UN군과 레바논 정부군이 헤즈볼라의 무장해제를 시도하려고 하면 이스라엘군도 이기지 못한 헤즈볼라와 싸울 수 밖에 없고 이란과 시리아가 헤즈볼라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한 헤즈볼라는 약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이 지역의 평화는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평화협정을 맺고, 이란 또한 미국 및 이스라엘과 어떤 합의에 이르지 않는 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출처 : When Computers Went To Sea
글쓴이 : 백선호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