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전쟁

[스크랩] 포클랜드전쟁 1편 - 영유권 분쟁의 기원부터 아르헨티나의 침공 직전까지

Humancat 2006. 12. 19. 17:44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남대서양의 한쪽 구석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섬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였다. 4월 2일 아르헨티나의 기습 침공으로 시작되어 6월 14일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끝난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격적인 해전이 벌어진 전쟁이었고 바다에서는 일방적이기만 했던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걸프전쟁보다 우리에게 해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앞으로 포클랜드전쟁의 배경, 경과 및 결과에 대해 12회에 걸쳐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자.

 


              

영유권 분쟁의 기원

         

포클랜드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동해안에서 483km, 남극의 가장 북쪽으로부터 940km 떨어진 약 700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영국의 해외 영토이다. 크게 서 포클랜드와 동 포클랜드 섬으로 나뉘고 동 포클랜드의 동해안에 수도 <스탠리>가 있다. 포클랜드는 원래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고 18세기까지는 펭귄들이 이 섬의 주인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종주국이었던 스페인과 영국의 역사가들은 각각 자국의 탐험가들이 가장 먼저 포클랜드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포클랜드를 처음 발견한 것으로 널리 인정되는 사람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VOC의 무장상선 선장이었던 <Sebald de Weert>이다. 이 네덜란드 사람은 1598년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남아메리카 남쪽 끝의 마젤란 해협을 거쳐 지금의 인도네시아인 몰루카의 향신료 제도로 가려던 5척의 선단 중의 1척의 선장이었다. 그러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다음 거센 바람에 선단이 흩어져 결국 포기하고 같은 길로 돌아오다가 그는 1600년 서 포클랜드의 북서쪽에 있는 작은 무인도들을 발견하고 <Sebald de Weert 제도>라고 이름 지었다. 이 때 선단 중의 다른 1척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까지 갔고 이 네덜란드 배의 항해사였던 영국 사람 윌리엄 애덤스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고 일본에 정착해 대양을 건널 수 있는 배를 만들어 주었다.

         

포클랜드를 발견한 Sebald de Weert가 속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단

가운데의 <Tgeloof>가 Sebald de Weert가 선장이었던 배

                    

포클랜드는 17세기 중에는 <Sebald de Weert 제도>라고 알려졌는데 <포클랜드 Falklands>라는 이름은 1690년 영국 사람 <존 스트롱>이 이곳에 처음으로 상륙하고 이 탐험의 비용을 댄 후원자이고 나중에 영국의 해군장관이 되는 <제5대 포클랜드 백작 앤소니 캐리>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아르헨티나가 부르는 이 섬의 이름 <말비나스 Malvinas>는 1764년 프랑스 사람 <루이 앙트완 드 부갠빌 Louis Antoine de Bougainville>이 프랑스 서부 브레타뉴 지방의 항구 <생 말로 Saint-Malo>에서 사람들을 데려와서 정착시키고 이 사람들을 <Iles Malouines>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프랑스 사람들이 첫 정착민이고 이들은 지금의 동 포클랜드 섬의 <포트 루이스>에 마을을 세웠다. 그런데 이 정착촌과 여기에 기반한 프랑스의 영유권 주장은 1713년 영국과 프랑스가 남아메리카 대륙과 주변의 섬들에 대한 스페인의 영유권을 인정한 유트레히트 조약을 무시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프랑스 정착촌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1765년 1월 영국해군 선단이 서 포클랜드 섬의 북서쪽에 있는 손더스 섬에 와서 이곳과 주변의 섬들이 영국의 왕 <조지 3세>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이듬해 1766년에는 <존 맥브라이드>가 약 100명의 정착민을 데리고 와서 포클랜드의 <포트 에그몬트>에 영국 정착촌 겸 요새를 건설했다. 맥브라이드는 250명으로 불어난 포트 루이스의 프랑스 정착촌을 발견하고는 이들이 영국 영토를 무단 점유하고 있다며 떠나라고 권유했지만 이들이 순순히 떠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같은 해 스페인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는 지금까지 동 포클랜드의 프랑스 정착촌을 유지하는데 든 비용을 스페인이 보상하면 이곳을 스페인에게 넘기고 떠나겠다고 동의했다. 그리하여 스페인은 이듬해 1767년부터 동 포클랜드를 지배하게 되었고 <포트 루이스> 또한 <푸에르토 솔레다드>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국과 스페인은 잠시 서로 맞부딪히는 일이 없이 지냈지만 1769년에는 영국과 스페인 군함이 주변을 측량하다가 마주쳐 서로 자국의 영토에서 떠나라고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듬해 1770년, 스페인 군함이 서 포클랜드의 포트 에그몬트로 와서 이곳의 책임자인 영국해군의 <앤소니 헌트>에게 말로 할 때 순순히 떠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헌트는 영국 국왕이 떠나라고 명령하면 떠나지 다른 어느 누구의 철수 요구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이곳이 영국 영토임을 강조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침공했을 때 영국 총독의 이름도 헌트이다). 결국 1770년 7월 14일, 5척의 군함에 1,400명의 병력을 태운 스페인 함대가 다시 서 포클랜드의 포트 에그몬트 앞바다에 나타났다. 압도적인 무력의 차이 앞에서 헌트와 영국 정착민들은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고 이 소식이 영국 본국에 전해지자 1771년 1월 22일 영국은 서 포클랜드의 포트 에그몬트를 돌려주지 않으려면 전쟁을 각오하라고 스페인을 위협했다. 남대서양의 외딴 섬에 있는 정착촌 겸 요새 하나 때문에 영국과 전쟁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스페인은 결국 영국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같은 해 9월 13일 2척의 영국 군함이 서 포클랜드에 다시 나타나 빼앗겼던 포트 에그몬트를 되찾았다.

        

영국과 스페인의 철수

      

포트 에그몬트는 아프리카의 남쪽 끝을 돌아 인도양으로 가거나 대서양으로 돌아오는 영국 군함 및 상선에게 식량과 각종 필수품을 공급하는 기지로 성장했다. 그러나 곧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 영국은 전쟁비용을 대느라 재정이 쪼들리게 되었고, 포클랜드처럼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식민지에서는 일단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776년 5월 20일 포트 에그몬트 요새의 지휘관 클레이턴 대위는 영국의 국기와 이곳이 영국의 영토라는 내용을 새긴 금속제 판을 남겨놓고 부하들을 이끌고 여기를 떠났다. 영국 군대와 정착민이 떠난 포트 에그몬트는 곧 바다표범을 잡으러 온 여러 나라 사냥꾼들의 차지가 되었는데 동 포클랜드의 스페인 식민 당국에서는 영국이 서 포클랜드의 포트 에그몬트를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곳이 다국적 사냥꾼 소굴이 되었음을 알게 된 스페인 당국은 이들에게 떠나라고 했지만 사냥꾼들은 그냥 무시했고 결국 스페인 식민 당국은 클레이턴 대위가 남긴 금속제 판을 지금의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옮기고 1780년 3월 스페인 본국의 명령에 따라 포트 에그몬트의 시설물들을 모두 파괴했다.

           

이로써 스페인은 1780년부터 포클랜드의 유일한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도 곧 전세계적으로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리고 주로 바다에서 영국과 싸우며 막대한 전쟁비용을 썼다. 결국 스페인도 영국처럼 전쟁을 하느라 포클랜드의 식민지를 유지할 돈이 없게 되었고 1806년 스페인의 마지막 총독 마르티네즈도 영국처럼 동 포클랜드의 푸에르토 솔레다드에 스페인 국기와 이곳이 스페인의 영토라는 내용을 새긴 금속제 판을 남겨놓고 떠났다. 총독은 떠났어도 몇몇 정착민은 남았지만 아직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는 없어서 이들은 지금의 우루과이 수도인 스페인 식민지 몬테비데오에서 오는 식량과 물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1807년 영국이 몬테비데오를 공격해 점령하자 포클랜드의 주민들은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1811년 지금의 아르헨티나를 관할하던 스페인 식민 당국은 남은 정착민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이 때부터 포클랜드는 여러 나라에서 온 어부들과 사냥꾼들의 자치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독립

          

1816년 7월 9일,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고 1820년에는 아르헨티나 주변의 스페인 식민지는 아르헨티나 소유라고 주장하며 포클랜드가 자국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곧 미국의 범선을 임대해 포클랜드에서 바다표범 사냥꾼들과 고래를 잡으러 온 포경선들을 모두 내쫓았고 1820년 11월 6일 아르헨티나 정부가 고용한 미국 사람 <대니얼 주위트>는 옛 푸에르토 솔레다드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걸었다. 8년이 지난 182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사업가인 <루이 베르네>는 3년 내로 동 포클랜드에 정착촌을 건설한다는 조건으로 동 포클랜드 섬 전체를 개발할 권리와 주변 바다의 어업권을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받고서 자신의 가족과 네덜란드 및 독일 이민자들을 데리고 동 포클랜드로 이주했다. 이 프랑스 사업가는 영국이 이곳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앞으로 영국이 다시 와서 아르헨티나를 쫓아내더라도 자신의 사업을 무사히 지킬 수 있게 아르헨티나 주재 영국 영사를 찾아가서 영국 정부가 그의 사업을 허가한다는 스탬프도 받아냈다.

            

용의주도하고 사업 수완이 좋았던 베르네는 곧 이곳에서 난 말린 쇠고기와 소금에 절인 생선은 브라질에, 양털은 영국에 수출하기 시작했고 1831년에는 새로운 이민자를 구한다는 광고도 냈다. 그런데 1829년부터 미국 포경선들이 바다표범을 잡으러 이곳에 자주 오기 시작했고, 아르헨티나 정부로부터 독점 어업권을 받은 베르네는 아르헨티나 정부에게 군함을 보내 다른 나라의 포경선들을 내쫓아달라고 요청했다.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은 아르헨티나는 여기에 보낼 군함이 없었고 대신 이 프랑스 사업가를 총독으로 임명해 그가 직접 무장상선을 고용해 포경선들을 내쫓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베르네는 다른 나라의 포경선들을 무력으로 내쫓기 시작했는데 그러다가 되려 크게 당하고 만다.

        

미국 포경선 나포 사건과 미국해군의 보복

    

1831년 7월, 베르네는 미국의 포경선 <해리엣>이 법을 어기고 바다표범을 잡았다며 이 미국 포경선을 나포했고 선장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잡아가서 재판을 받게 했다. 사건이 터지자 아르헨티나 주재 미국 영사는 강하게 항의하며 미국은 포클랜드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군함 <렉싱턴>을 푸에르토 솔레다드로 보내 미국 포경선이 아르헨티나 당국에게 압수당한 물건들을 무력을 써서라도 되찾아오도록 명령했다. 결국 같은 해 12월, 미국 군함 렉싱턴은 자국 포경선이 뺏긴 물건을 되찾기 위해 푸에르토 솔레다드 앞바다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런데 렉싱턴의 함장은 영사로부터 받은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버렸다. 푸에르토 솔레다드를 완전히 때려부수고 포클랜드는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섬이라고 선언하고는 떠나버린 것이었다.

         

미국 포경선을 나포했다가 유일한 정착촌이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엄청난 보복을 당한 베르네 총독은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고 1832년 10월에야 임시 총독이 가족을 데리고 폐허가 된 푸에르토 솔레다드에 부임했다. 그러나 이 때 영국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국 정부는 포클랜드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과 미국의 난폭한 행동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곳으로 다시 군함을 보내 12월 20일 옛 포트 에그몬트에 영국 영토라는 표시를 세웠다. 마침 이 무렵, 얼마 되지 않는 푸에르토 솔레다드의 정착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갓 부임한 아르헨티나 임시 총독을 죽였고 여기에 와 있던 영국과 프랑스 배가 도와서 겨우 폭동이 진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며칠 지나고 1833년 새해가 밝자마자 영국 군함 1척이 나타나 죽은 총독에 이어 푸에르토 솔레다드의 책임자가 된 아르헨티나 군함 <사란디>의 함장과 살아남은 20명의 정착민들에게 이곳은 영국 영토이니 당장 떠나라고 통고했다. 이들은 우세한 영국의 무력 앞에 굴복하고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영국이 포클랜드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영국령 포클랜드

           

정착하고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포클랜드는 영국이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영국 사람들이 이민오기 시작해 약 100년이 지난 1930년대에는 주민의 숫자가 2400명에 달했고 이들은 주로 양을 키워 양털과 양고기를 수출하며 생계를 꾸렸다. 19세기에 범선의 시대가 끝나고 증기선의 시대가 오자 포클랜드에는 영국해군의 석탄보급기지가 설치되었고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서 곧 전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중국 산뚱 반도의 칭따오에 배치되어있던 독일 동양함대는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호주해군과 일본해군을 피해서 본국으로의 귀환을 시도했고, 이들은 태평양을 동쪽으로 횡단해서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을 돌아 12월에 남대서양으로 들어왔다. 석탄이 부족했던 독일함대는 포클랜드의 석탄보급기지를 덮쳐 석탄을 얻으려고 했지만 이들을 잡기 위해 마침 포클랜드에 와 있던 영국함대에게 전멸당하고 만다. 이 <포클랜드 해전>을 제외하고는 포클랜드는 “잊혀진 섬”으로 남았고 1952년에는 포클랜드를 미국에게 넘기는 것까지 영국 정부 안에서 잠시 고려되었다.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 않았고 전세계의 모든 식민지에 독립을 주라는 1960년 UN의 <식민지독립부여선언>을 가지고 영국에 대한 외교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거의 전부 영국 사람의 후손인 포클랜드 주민들은 포클랜드가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있기를 원했고 UN은 <인민 자결권> 또한 인정하기 때문에 포클랜드 주민들의 조상이 갑자기 영국 사람에서 스페인 사람으로 바뀌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르헨티나가 외교적인 방법으로 포클랜드를 자국 영토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포클랜드의 국기(?)

          

1982년 <말비나스의 해>

          

아르헨티나의 육해공 3군은 1976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군사독재를 시작했다. 이 군사정권은 모든 반대자들을 납치, 고문, 살해하는 <더러운 전쟁>을 1978년까지 벌이며 수천 명의 실종자를 만들어냈고 육해공 3군의 최고사령관들로 구성된 <군사 평의회>가 모든 일을 결정했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육군 장성들끼리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며 정권을 이어갔고, 1981년 12월 <레오폴도 갈티에리> 육군대장이 세 번째 군 출신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3인 군사 평의회의 1명이 포클랜드를 무력을 써서라도 빼앗아야 한다는 강경파였으니 그가 바로 아르헨티나해군의 최고사령관 <아이삭 아나야> 해군대장이었다. 어릴 때 갈티에리 장군의 학교 친구였던 아나야 제독은 1970년대 초반 영국이 유약한 지도자와 경제불황 때문에 허덕일 때 영국 주재 해군 무관이었고 갈티에리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는 것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포클랜드 침공을 내걸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강경파였다.

            

갈티에리 장군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민심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는 조치가 취해졌고, 언론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또한 조금이나마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2년 3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유혈 폭동이 일어나 1,500명이 체포되는 등 정치적, 사회적 불안은 여전했고 마침 1833년의 150주년이 되는 1983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83년 1월 이전에 외교적이든 군사적이든 모든 수단을 써서 1982년 중에 포클랜드를 되찾자는 여론이 거세졌고, 갈티에리 대통령이 취임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1981년 12월 15일, 이듬해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명령이 떨어진다.

          

이날 아나야 제독은 새로 취임한 아르헨티나해군의 작전사령관 <후안 롬바르도> 해군중장에게 포클랜드를 침공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롬바르도 중장이 받은 지시의 내용은 포클랜드에 기습적으로 상륙해서 잠시 점령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포클랜드를 침공하되 계속 점령하고 영국의 반격에 대비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르헨티나가 이 섬을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을 전세계에 과시한 다음 스스로 물러나 전세계의 여론을 아르헨티나의 편으로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침공 작전의 기획에 참여한 <구알테르 알라라> 해군소장의 증언에 따르면 이전에도 아르헨티나 해군대학 같은 곳에서 비슷한 계획을 많이 짰었고, 이번 계획 또한 처음에는 반드시 실행하겠다는 것이 아닌 비상시 계획에 불과했다.

            

롬바르도 중장은 다시 한번 아나야 대장으로부터 첫째 이 작전을 3군 합동작전으로 계획하고, 둘째 영국의 반격에 대한 방어는 고려하지 않으며, 셋째 극비로 진행해야만 함을 확인 받고 구체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포클랜드를 일단 점령한 다음에 영국의 반격에 대한 방어를 고려하지 않은 이유는 영국이 800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이 외딴 섬을 되찾겠다고 군대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단정한 이유는 1976년부터 아르헨티나군이 남극 근처에 있는 영국의 해외 영토인 <사우스 샌드위치> 제도의 <Southern Thule>을 무단 점거했지만 영국이 가만히 있었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전혀 없는 무인도를 무단 점거하는 것과 2천여 명의 영국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을 점령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이 지레짐작이 아르헨티나가 반년 지나서 전쟁에 지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아르헨티나해군은 이 침공 계획이 외부에 알려져 영국이 핵추진 공격 잠수함(SSN)을 보내는 사태를 가장 두려워했다. 영국 SSN이 1척이라도 포클랜드 근해에 나타나면 침공은 불가능하다고 아르헨티나해군은 판단했고, 1977년 롬바르도 중장이 잠수함대 사령관일 때 아나야 대장은 독일에서 사오기로 한 209형 디젤/전기추진 잠수함(SSK)이 영국 SSN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인지 물은 바 있었다.

          

아르헨티나 군부가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위상은 잃었지만 여전히 전세계에서 3~4위를 다투는 강대국이었던 영국을 상대로 군사적인 모험을 감행할 결심을 한 배경에는 영국이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뿐만 아니라 미국이 아르헨티나를 지지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도 중립은 지킬 것이라는 계산 또한 있었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강력한 반공주의를 내세운 아르헨티나 군사정권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이 소련에 대한 곡물수출을 중단했을 때 아르헨티나의 곡물이 소련인의 배를 채워주어 아르헨티나와 소련의 사이 또한 나쁘지는 않았다.

           

1982년 새해가 밝고 1월 중순이 되어 아르헨티나 육해공 3군의 대표가 포클랜드 침공 작전에 대한 첫 회의를 가졌다. 각 군의 참모장교들이 참가한 계획 단계에서 작전의 성격이 기습 침공 후 자진 철수에서 기습 침공 후 영구 점령으로 바뀌었고 9월 15일까지 모든 계획을 마치기로 기한이 정해졌다. 9월 15일로 잡은 이유는 영국에 대한 외교적인 공세를 취할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작전하기가 어려운 겨울을 피하며 (남반구에서는 6, 7, 8월이 겨울임), 9월까지 아르헨티나해군항공대에 프랑스제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 14대와 엑조세 공대함 미사일 15발의 장비가 끝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81년 영국 국방부가 포클랜드 경비함 <엔듀런스>를 1982년 9월에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한 것도 계획 기간을 9월까지 충분히 준 이유 중의 하나였다.

             

계획의 내용은 일부 육군 병력을 포함한 해병대가 주력이 되어 포클랜드에 상륙해 영국군의 저항을 무력화시키고, 그 다음 육군 1개 연대를 이곳에 보내 영구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해군의 역할은 해병대를 상륙함에 태워 나르는 것이었고 공군의 역할은 기습이 성공한 다음에 약간의 수송기를 제공하는 것뿐이었다. 작전에 투입할 부대는 해병 2대대로 곧 결정되었고 이 부대는 2월과 3월에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에서 포클랜드와 비슷한 해안을 골라 상륙훈련을 실시했다. 해병 2대대에서 이 훈련이 포클랜드 침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3명뿐이었고 2월 셋째 주에 상륙기본계획이 완성되었다. 이어 3월 9일에는 이 계획이 군사 평의회에 보고되어 승인을 받았다.

         

사우스 조지아 사건

       

포클랜드의 수도 스탠리로부터 남동쪽으로 800마일 떨어진 남극 근처의 바다에 또 다른 영국의 해외 영토인 사우스 조지아 섬이 있다. 이곳은 1775년 제임스 쿡 선장이 처음 상륙한 섬인데 길이가 100마일에 달할 만큼 꽤 크지만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춥고 황량하고, 그래서 19세기에는 주로 포경선들이 잠시 머무르는 포경선 기지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고래가 멸종 위기에 몰려 포경 산업이 쇠퇴하며 포경선 기지들이 버려졌고 그 다음부터 이곳에는 과학 관측 기지만 남게 되었다.

 


사우스 조지아 섬

        

1978년 10월, 아르헨티나의 사업가 <콘스탄티노 다비도프>는 사우스 조지아 섬의 버려진 포경선 기지를 해체하고 여기서 나올 3만 5천 톤의 고철을 사고 싶다고 이곳을 소유한 영국 회사에 접근했다. 협상은 거의 1년을 끌어 이듬해 1979년 9월에야 다비도프가 1982년 3월까지 포경선 기지를 해체하고, 여기서 나온 고철을 약 10만 파운드에 산다는 내용의 계약이 이루어졌다. 다비도프는 계약 만료 시한이 코앞으로 다가온 1981년 12월에야 사우스 조지아로 가서 사전 답사를 했는데 이 때 사우스 조지아의 영국 과학 관측 기지가 있는 <그리트비켄>으로 가서 상륙 허가를 받지 않았다. 다비도프가 상륙 허가에 관한 영국의 법규를 알고도 무시했는지 아니면 몰라서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상륙 허가에 대한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분쟁이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을 반년 앞당겼다는 것이다.

           


1929년의 그리트비켄 - 포경선 기지

         

다비도프가 아르헨티나로 돌아간 다음 영국 정부는 이 <무허가 상륙>에 대해서 아르헨티나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 항의를 무시했지만 다비도프 자신은 1982년 2월 23일 영국 대사관을 찾아가 사과했다. 여기서 그는 3월에 포경선 기지 해체 인부들을 사우스 조지아의 <리스>로 보내겠다고 알렸고, 앞으로 서로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명확한 지침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포클랜드의 <렉스 헌트> 총독에게 전달되었지만 답변은 빨리 오지 않았고, 3월 9일 다비도프는 일단 41명의 해체 인부를 아르헨티나해군에서 빌린 수송선에 태워 3월 11일에 사우스 조지아의 리스로 보내겠다고 영국 대사관에 정식으로 신고했다. 이틀 후 여전히 영국으로부터 지침을 받지 못한 채로 아르헨티나해군 수송선은 41명의 인부를 태우고 사우스 조지아로 출발했고 이 배는 16일 리스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는 리스에 상륙한 아르헨티나 인부들은 여기에 아르헨티나 국기를 세웠고 가지고 온 사냥용 총도 쏴댔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줄 알았지만 마침 과학 관측 기지에서 나와 관측 활동을 하고 있던 영국 과학자들 중의 1명이 이것을 고스란히 목격했고 그리트비켄의 과학 관측 기지는 이 사건을 무전기로 포클랜드에 있는 헌트 총독에게 보고했다. 3월 20일, 헌트 총독은 과학자들에게 무전기로 아르헨티나 인부들과 교신해서 아르헨티나 국기를 내리고 그리트비켄으로 와서 상륙 허가를 받게 하라고 지시했다. 영국 과학자들과 무전기로 교신한 아르헨티나 인부들은 곧바로 국기는 내렸지만 리스로부터 20마일 떨어진 그리트비켄까지 상륙 허가를 받으러 가지는 않았고, 이들을 태우고 온 수송선은 상륙용 주정 LCVP 2척을 남긴 채 3월 21일에 그냥 떠나버리고 말았다.

           

수송선이 떠나버리기 하루 전인 3월 20일, 헌트 총독은 이 사건을 영국 정부에 보고했는데 보고의 내용에 한가지 큰 잘못이 있었다. 사우스 조지아에 무허가 상륙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이라고 잘못 알고 그대로 보고한 것이었다. 이러한 보고를 받은 영국 정부는 이들이 스스로 떠나지 않으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아르헨티나에 통보한 다음 해병대원 22명을 태운 포클랜드 경비함 엔듀런스를 사우스 조지아로 급히 보냈다. 3월 21일, 아르헨티나 인부들이 모두 수송선을 타고 떠났을 것이라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답변을 받은 영국 정부는 사우스 조지아로 가던 엔듀런스를 되돌렸는데 그 다음 날 3월 22일, 사우스 조지아의 영국 과학자들이 아르헨티나 인부들이 그대로 리스에 남아 있고 상륙 허가도 아직 받으러 오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엔듀런스에게 다시 사우스 조지아로 가도록 명령했고, 3월 23일 영국 외무장관 캐링턴 卿은 아르헨티나 인부들을 태우고 온 아르헨티나해군 수송선이 돌아가서 이들을 데려가지 않으면 영국해병대원들이 이들을 모두 잡아가겠다고 아르헨티나 정부에 통보했다. 영국 정부가 과잉 대응을 한다고 여긴 아르헨티나 정부도 결국 강경하게 대응하기로 결정했고, 마침 주변에서 훈련하고 있던 수송함 <바히아 파라이소>에 아르헨티나 해군수병, 해병대원, UDT대원 14명을 태우고 사우스 조지아로 급히 보냈다. 이 때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보면 22명의 해병대원을 태운 영국의 엔듀런스는 24일 그리트비켄에 도착해 대기했고, 아르헨티나의 바히아 파라이소는 25일에 리스에 도착해 26일에 14명의 무장병력을 상륙시켰다. 그리하여 눈 덮인 이 황량한 섬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20마일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고, 예상치 못한 때와 장소에서 영국과 무력 충돌을 할 수도 있는 위기가 벌어지자 아르헨티나 군부는 내친김에 준비하고 있던 포클랜드 침공을 곧바로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이 사건은 어떤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고철을 수집하기 위해서 영국의 해외 영토 사우스 조지아 섬으로 간 아르헨티나 인부들이 영국의 법규를 어기고, 이들이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으로 잘못 알려져 영국 정부가 과잉 대응을 하게 되고, 아르헨티나가 마침 준비하고 있던 포클랜드 침공 계획을 갑작스럽게 실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When Computers Went To Sea
글쓴이 : 백선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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