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기동부대를 출동시키고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주둔 병력을 늘려 두 나라가 전쟁으로 치닫고 있을 때 이들을 말려 보겠다고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오가는 “셔틀 외교”에 나선 미국의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은 특이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1947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여 일본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사령부에 배치되었던 헤이그는 한국전쟁에는 위관급 장교로, 베트남전쟁에는 대대장 및 여단장으로 참전해서 미국의 가장 높은 훈장인 의회명예훈장 (Medal of Honor) 바로 아래의 수훈십자장(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받은 직업군인 출신이었다. 그는 육군대령이었던 때인 1969년 워싱턴으로 불려와 <헨리 키신저> 국가 안보 보좌관의 군사 담당 보좌관이 되었고, 곧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키우는” 인물이 되어 현역 육군소장이면서 닉슨과 키신저의 중국 방문을 포함한 여러 비밀 외교활동에 참가했다. 1973년 육군소장에서 육군대장으로 갑자기 2단계 뛰어 육군참모차장이 된 헤이그는 대통령 비서실장과 NATO군 총사령관을 1979년까지 차례로 맡은 다음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국무장관이 되어 국제정치무대로 돌아왔다. 헤이그는 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키신저처럼 미국의 외교정책을 한 손에 주무르고 싶어했고, 포클랜드 위기는 키신저 국무장관이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 멋지게 해낸 “셔틀 외교”를 자기도 한번 따라서 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미국 외교안보 팀의 두 파벌
이 때 미국 정부의 외교안보 팀에는 2개의 세력이 있었다. 하나는 UN에서 영국의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막으려고 했던 <진 커크패트릭> UN 대사와 국무부의 미주 담당 차관보인 <토머스 엔더스>가 이끌었고, 이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소련과 쿠바의 영향력 확대를 막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라틴 아메리카를 중시했던 이 파벌의 별명은 “라티노”였다. 마침 1979년에는 중앙 아메리카의 니카라과에서 좌익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정권을 잡아 “제2의 쿠바”가 되었고, 옆 나라 엘살바도르에서는 1980년부터 좌익과 우익이 싸우는 내전이 터졌으며, 또 다른 옆 나라인 온두라스도 정치 상황이 불안했다. 1970년대에 “더러운 전쟁”을 벌여 국내의 좌익 세력을 닥치는 대로 잡아 고문하고 죽였던 아르헨티나의 극우 군사 정권은 이 때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 정부의 좌익 게릴라 소탕을 도왔고, 커크패트릭 대사와 같은 “라티노” 파벌은 이런 아르헨티나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영국에 우호적인 세력은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과 <로렌스 이글버거> 유럽 담당 국무차관보가 이끌었고 이들은 “유럽주의자” 또는 “대서양주의자”라고 불렸다. 이 중에서 특히 이글버거 차관보는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영국이 곤경에 빠졌는데 미국이 영국을 돕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982년 이전에 영국이 독자적으로 벌였던 마지막 전쟁은 영국이 미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프랑스 및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침공했던 1956년의 수에즈 분쟁이었다. 이 때는 영국이 프랑스, 이스라엘과 음모를 꾸이고 이집트를 침략하는 분명한 잘못을 저질렀지만 1982년의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가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경우였고 영국이 피해자였다. 미국 정부 안의 “대서양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영국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레이건 행정부.
앞줄 왼쪽부터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조지 부시 부통령,
영국의 편을 든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이고 가운데에 있는 여성이 아르헨티나의 편을 든
진 커크패트릭 UN 대사이다.
참고로 1956년의 수에즈 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수에즈 운하 지역을 점령해 군사적으로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미국의 경제적 압력과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해서 이집트의 민족주의 정권을 제거한다는 정치적인 목적은 달성하지 못한 채로 마지못해 군대를 철수시켰고, 미국과 영국의 관계는 이 때 최악이었다. 1956년 이후부터 영국은 국제 무대에서 무엇이든 하려면 미국의 지지를 꼭 얻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고, 이것은 영국의 외교안보 정책의 기본이 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수에즈 분쟁의 경험에서 정반대의 결론을 내려 미국 및 영국과 멀리하고 대신 독일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유럽연합의 창설로 이어졌다.
헤이그의 제안
헤이그는 포클랜드 침공을 감행해서 평화를 깨뜨린 아르헨티나를 지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처음부터 좀 더 중립적이지 못할 것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4월 7일의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헤이그가 나서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협상 테이블로 데려온다는 결정이 났는데 이 때 미국 정부는 영국이 사우스조지아 섬은 쉽게 되찾을 수 있겠지만 포클랜드를 되찾는 데는 많은 사상자가 날 것이고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고 보았다. 헤이그는 영국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호전적이고 예측할 수 없으며 영국에게 가장 좋은 선택은 아르헨티나를 해상 봉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헨티나에 대해서는 이들의 국제 여론의 비난과 영국과의 전쟁 가능성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다고 헤이그는 생각했다. 이러한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위해 헤이그가 내놓은 제안은 다음과 같았다.
- 첫째,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영국은 기동부대를 돌려보내며 두 나라 모두 포클랜드 주변 200 마일에 어떠한 군사력도 배치하지 않는다.
- 둘째,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다국적 기구가 포클랜드의 치안과 행정을 맡고 영국과 아르헨티나도 여기에 각자 관리를 파견한다.
- 셋째, 포클랜드 주민의 의사를 반영해서 포클랜드의 주권에 어디에 속하는지 협상을 통해 결정한다.
헤이그는 먼저 영국 대사 <니컬러스 헨더슨>에게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함께 포클랜드를 통치하는 것이 어떠냐고 떠봤다. 헨더슨 대사는 아르헨티나군이 철수하고 영국의 통치가 복원되어야만 아르헨티나와 협상이 가능하다고 단호하게 헤이그의 제안을 거부했고, 불과 1년 전까지 52명의 미국 대사관 직원이 무려 444일이나 이란에서 인질로 잡혀있었던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약 2000명의 영국계 주민들이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의 볼모가 된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 있냐고 되물었다. 자신의 제안에 대한 영국의 입장은 헨더슨 대사의 단호한 거부를 통해서 이미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그는 “셔틀 외교”의 첫 목적지로 런던을 선택했다. 내세운 이유는 미국의 국무장관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먼저 가면 미국과 아르헨티나가 짜고 뭔가 꾸민다는 인상을 영국 국민들에게 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탐탁지 않았지만 헤이그의 런던 방문에 동의했다.
마거릿 대처 총리
런던에서 헤이그가 만날 마거릿 대처 총리는 1979년에 집권한 영국의 첫 여성 총리였다. 작은 식품 가게 주인의 딸로 태어난 대처 총리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식품 회사에 취직해 아이스크림의 보존 방법을 연구했다. 이렇게 화학 엔지니어로서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결혼하고 나서 대처 총리는 법학을 공부해 변호사가 되었고, 1959년 보수당의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1961년 국민연금 담당 차관보, 1970년 교육부 장관을 거친 다음 1975년 보수당의 당수가 되었고, 4년 후 1979년 총선거에서 노동당을 꺾어 영국의 첫 여성 총리가 되었다. 대처 총리는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교와 국방에 관한 공직은 맡은 바 없었고, 영국의 마지막 공격 항공모함 <아크 로열>이 4년 전인 1978년에 퇴역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정도로 국방 문제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빨리 배우는 똑똑한 사람이여서 합참의장 <테렌스 르윈> 해군대장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녀의 비서관 <클라이브 휘트모어>는 대처 총리가 신속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쏟아지는 정보를 올바르게 해석해 주었다.
1979년 총선거에서 이기고 총리가 되어 타임의 표지 인물로 나온 마거릿 대처 총리
넬슨과 웰링턴을 보라
헤이그 국무장관 일행이 런던에 도착하자 대처 총리는 이들을 총리 관저로 불러 들였고 저녁 식사에 앞서 관저의 이곳 저곳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대처 총리가 헤이그 국무장관 일행을 이끌고 간 방에는 대처 총리의 기분뿐만 아니라 영국 전체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초상화 2점이 걸려 있었다. 다름 아닌 영국의 가장 유명한 영웅인 넬슨 제독과 웰링턴 장군의 초상화였다. 이것으로 헤이그의 일행은 대처 총리가 미국의 제안에 동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1단계로 아르헨티나와 영국 모두 포클랜드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2단계로 미국, 캐나다,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어떤 두 나라로 구성된 다국적 기구가 포클랜드를 잠시 통치하며, 3단계로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협상을 통해서 포클랜드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헤이그의 제안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2단계였다. 영국은 이 2단계가 침공 이전의 상태, 다시 말해 영국의 통치를 복원하는 단계가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정반대인 아르헨티나의 통치를 확립하는 단계가 되기를 바랬고 어느 쪽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니 미국의 제안은 처음부터 실현될 가능성이 낮았다.
소련의 개입 가능성
헤이그는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전쟁을 하게 되면 소련이 아르헨티나의 편이 되어 참전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전달했지만 대처 총리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여겼고, 아르헨티나군의 철수와 영국 통치의 복원 말고는 어떤 다른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못박았다. 대처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영국의 결의를 보여주었다. "아르헨티나 정권이 알아 듣는 말이 무력뿐이라면 무력을 쓸 것이다 (If strength was the only language the Argentine regime understood, it would have to be exercised)." 나중에 헤이그는 아르헨티나로 가서 군부 지도자들을 만났을 때 소련이 아르헨티나에게 영국 군함을 격침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실 헤이그는 이것을 믿지 않았다. 3차 세계대전이 터질 수도 있는 너무나 엄청난 믿기 힘든 시나리오였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얘기가 나온 배경에는 아르헨티나와 소련의 곡물 무역이 있었다. 1979년 12월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1980년 1월 미국은 보복으로 소련에 대한 곡물 수출의 부분적인 중단을 발표했고 그 해의 모스크바 올림픽도 참가를 거부했다. 미국이 떠난 빈 자리를 메운 나라가 다름아닌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는 1981년 전체 수출의 36%, 곡물 수출의 3/4에 해당하는 1,200만 톤의 곡물을 소련에 팔았고, 이는 소련의 곡물 부족분의 1/3을 채워주었다. 이런 이유로 헤이그가 영국에게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 아르헨티나 본토에 대한 해상 봉쇄는 소련의 개입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게다가 아르헨티나는 볼리비아,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 파라과이와 육지로 연결되어 바다를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수입품과 수출품을 나를 수 있었다.
헤이그는 영국 통치의 즉시 복원 대신 임시적인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겠냐고 물었지만 대처 총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헤이그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자는 <프랜시스 핌> 외무장관을 미국인들이 보는 앞에서 매섭게 노려보며 꾸짖기까지 했다. 아르헨티나가 어느 정도 발언권을 갖게 될 "임시적인 다른 방법"에 대해서 대처 총리는 1938년에 독일의 히틀러와 비슷한 임시적인 합의를 이루었지만 결국 2차 세계대전을 막지 못한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사례를 얘기하며 영국은 아르헨티나가 침략 행위를 통해서 포클랜드의 미래에 대한 발언권을 얻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르헨티나군의 능력에 대한 영국의 평가
미국이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을 막겠다고 뛰고 있을 때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평가하고 이에 따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먼저 영국군은 포클랜드를 되찾는데 90일 걸릴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 전투가 시작되면 어쩔 수 없이 생길 사상자의 규모는 상륙하고 처음 7일간 상륙부대의 20%까지로 예상했고, 영국해병대는 훈련부대에서 500명을 사상자 보충을 위한 병력으로 미리 정해두었다. 항공기와 군함의 손실은 최대 25%까지로 잡았고, 이에 따라 새로 보낼 항공기와 군함도 준비되었다.
영국 기동부대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아르헨티나의 공군과 해군항공대였다. 이 때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공군과 해군항공대가 모두 247대의 전투용 항공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고, 이 중에는 프랑스제 초음속 전천후 전투기 미라지 III 16대, 프랑스의 미라지 5를 이스라엘이 베껴 만든 초음속 전폭기 대거 26대, 프랑스제 엑조세 AM39 공대함 미사일을 쏠 수 있는 프랑스제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 5대, 미국제 A-4B/C 스카이호크 공격기 76대, 영국제 캔브라 B62 폭격기 9대, 기타 경 공격기 115대가 있었다. 여기서 겨우 60대만 실질적인 전투 능력이 있을 것으로 영국은 판단했는데, 그 이유는 첫째 부품이 부족해서 가동률이 낮았고, 둘째 경 공격기 115대 중에서 본토에서 발진해 포클랜드까지 날아올 수 있는 것은 단 1대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전체 경 공격기 세력의 40% 정도를 차지하는 45대의 아르헨티나 자국산 쌍발 프로펠러 추진식 공격기 IA-58 푸카라는 원래 반정부 게릴라와 싸우기 위해서 만든 느린 COIN (COunter INsurgency) 항공기여서 영국 기동부대의 시해리어 전투기, 시다트 및 시울프 함대공 미사일 앞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미라지 IIIEA 전투기
엑조세 AM39 공대함 미사일로 무장한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
공중급유를 받을 수 있었던 A-4C 스카이호크 공격기
IA-58 푸카라 공격기
영국이 알고 있던 것과 달리 아르헨티나가 1982년 4월 현재 실제로 가지고 있었던 주요 전투용 항공기 숫자는 다음과 같았다.
기종 | 영국이 알고 있던 숫자 | 실제로 있었던 숫자 |
미라지 IIIEA | 16 | 11 |
대거 A | 26 | 34 |
캔브라 B62 폭격기 | 9 | 6 |
쉬페르 에탕다르 | 5 | 5 |
A-4B/C/Q 스카이호크 | 76 | 57 |
계 | 132 | 113 |
영국해군 참모부는 기동부대가 아르헨티나의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전폭기가 배치된 기지로부터 700 노티컬 마일 떨어져 있으면 위협은 무시해도 괜찮은 수준이라고 판단했고, 300 노티컬 마일 안으로 들어가면 위협의 수준이 크게 높아질 것이라고 보았는데 특히 쉬페르 에탕다르와 엑조세 AM39 공대함 미사일이 두려운 존재였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공군과 해군항공대가 영국 기동부대를 공격하려면 먼저 이 기동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 영국 기동부대에 대한 위협의 정도는 아르헨티나공군과 해군이 넓은 남대서양을 샅샅이 뒤져서 어떤 배가 탐지되면 무엇인지 식별하고 추적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었다.
아르헨티나의 해양감시능력
실제로 해전에서 공격기나 대함 미사일의 실질적인 공격 가능 거리는 움직이는 표적을 탐지, 식별, 추적할 수 있는 능력에 좌우된다. 예를 들어 사거리 150km의 함대함 미사일을 조그만 고속정에 달았는데 만약 이 고속정이 혼자서 작전해야만 한다면 고속정에 달린 그 함대함 미사일의 실질적인 사거리는 고속정에 달린 레이더의 수평선 거리인 약 20~30km에 그치고 만다. 조금 더 큰 함정이라면 레이더를 더 높이 달 수 있어 레이더 수평선 거리가 약간 늘어날 것이다. 150km 사거리는 자신으로부터 150km 이상의 거리를 반경으로 하는 원 안을 실시간으로 탐색해서 그 안의 모든 선박을 식별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범선시대부터 1982년에 이르기까지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적함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였고, 넓은 바다에서 어떤 선박을 탐지해서 적함인지 아닌지 식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렇다.
이렇게 중요한 해양감시에서 아르헨티나의 능력은 썩 좋지 못했다. 가지고 있는 해상초계기는 낡은 미국제 SP-2H 넵튠 2대와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에서 쓸 수 있는 S-2E 트랙커 6대뿐이었고, 이들만으로는 넓은 남대서양을 빈틈없이 감시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설상가상으로 항속거리가 더 긴 SP-2H 넵튠은 정비 상태가 좋지 않아 언제 고장 날지 모르는 불안한 비행기였다. 결국 아르헨티나공군은 원래는 수송기인 보잉707 4발 제트여객기와 C-130 허큘리즈를 해양감시에 투입하고 아르헨티나해군은 민간의 상선과 어선을 영국 기동부대를 미행하는 임무에 동원하게 된다.
남대서양으로 가버린 영국의 핵무기
지브롤터 앞바다에서 훈련하다가 명령을 받고는 그대로 뱃머리를 돌려 남대서양으로 간 22형 호위함 <브릴리언트>에는 언론에 알려졌더라면 난리가 났을 무기가 2발 실려있었다. 다름아닌 MC(600) 핵폭뢰였다. 이 핵폭뢰는 소련의 핵추진 잠수함을 잡기 위해서 만든 무기였고 사용법은 링스 헬리콥터가 싣고 가서 적의 잠수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던지고 빨리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앞서 1960년대에 미국이 핵탄두를 단 ASROC 대잠수함 무기를 개발했을 때 사거리에 비해서 파괴력이 너무 강해 “PK = 2.0”, 다시 말해 이 무기를 쓰면 적도 죽고 나도 같이 죽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함대가 이미 남대서양으로 출동했다는 인상을 주어야만 하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귀관은 지브롤터에 들르지 말고 곧바로 가야 한다”는 필드하우스 작전사령관의 명령 때문에 <브릴리언트>를 비롯한 MC(600) 핵폭뢰를 싣고 있던 군함들은 핵폭뢰를 내릴 생각도 못한 채 남대서양으로 내려갔고, 테렌스 르윈 합참의장은 핵폭뢰를 가져갈 수 있도록 요청하지 않았고 또 쓸 계획도 없었지만 만약에 대비해서 가져가고 싶어 했다. 그 이유는 헤이그 국무장관이 대처 총리에게 말한 소련의 개입 가능성 때문이었다. 르윈 합참의장은 아무리 가능성이 낮아도 만약 소련이 잠수함을 몰래 보내 아르헨티나의 편을 들어 참전하면 핵폭뢰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월 7일 전쟁 내각이 처음으로 소집되었을 때 핵폭뢰 문제가 제기되었고 다음날 4월 8일에는 프랜시스 핌 외무장관의 제안에 따라서 핵폭뢰를 남대서양으로 가져가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미 핵폭뢰를 실은 채로 영국을 떠나 남대서양으로 가고 있는 여러 군함을 다시 불러들이면 기동부대의 포클랜드 도착이 너무나 늦어진다는 것을 곧 깨달았고 4월 11일에 모든 핵폭뢰를 항공모함 허미즈와 인빈서블에 모으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전투에서 피해를 입더라도 항공모함이 그나마 가장 안전하고, 핵폭뢰를 다룰 인력과 시설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허미즈와 인빈서블을 핵폭뢰를 실은 채로 전쟁을 치렀고, 5월 28일에 이 두 항공모함에 실린 핵폭뢰도 모두 영국으로 가져오라는 결정이 나자 인빈서블은 핵폭뢰를 영국으로 돌아가는 군수지원함 포트 오스틴에 옮겨 실었다. 그러나 허미즈는 전쟁이 끝나고 12일 지난 6월 26일에야 핵폭뢰를 군수지원함 리소스에 옮겨 실었고 리소스는 7월 20일에야 포츠머스로 돌아왔다. 전쟁 중에 격침된 2척의 42형 방공구축함 <쉐필드>와 <코벤트리>에는 원래 핵폭뢰가 실려 있었지만 이 핵폭뢰들은 이들이 격침되기 전에 항공모함으로 옮겨졌고, 핵폭뢰를 실은 채로 침몰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영국이 핵탄두를 단 폴라리스 미사일을 16발 실은 <레절루션>형 핵추진 탄도 미사일 잠수함(SSBN)을 남대서양으로 보냈다는 소문 또한 허무맹랑한 소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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