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전쟁

[스크랩] 포클랜드전쟁 6편

Humancat 2007. 5. 15. 20:20

미국의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이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오가며 전쟁을 막아보려 노력하고 있을 때, 영국은 포클랜드를 되찾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해 영국으로부터 포클랜드까지의 거리 약 8,000 마일의 가운데에 있는 영국의 해외영토인 조용한 <어센션> 섬이 갑자기 영국의 군함과 항공기로 북적거리게 되었다.

   

어센션 섬

    

대서양 한가운데 떠있는 어센션 섬은 원주민이 없었던 무인도였다. 181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어센션으로부터 남동쪽으로 800 마일 떨어져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면서부터 영국군이 어센션 섬에 주둔하기 시작했고, 2차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북아프리카로 가는 항공기의 중간 경유지로 개발되어 1942년에 미국이 길이 10,000 피트의 활주로를 이곳에 건설했다. 이 섬의 주인인 영국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미국이 건설한 활주로를 쓸 수 있도록 1962년에 미국과 합의했고, 1982년 어센션에는 세인트 헬레나에서 온 노동자를 포함해서 모두 1,1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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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항공사 Heavy Lift Cargo Airlines의 벨파스트 수송기

이 수송기는 원래 영국공군이 썼지만 1976년 민간에 매각되었다.

        

4월 5일, 영국공군의 웨섹스 헬리콥터 2대를 실은 민간항공사의 벨파스트 수송기 1대가 아프리카의 세네갈을 거쳐 어센션에 도착했다. 이 웨섹스 헬리콥터들은 곧 어센션으로 올 군수지원함 <포트 오스틴>에 탑재될 예정이었고, 이어 영국공군의 빅터 K2 급유기 17대, 벌컨 B2 폭격기 3대, C-130 허큘리즈 수송기 4대, 님로드 해상초계기 4대, 해리어 GR3 공격기 2대가 어센션에 배치된다. 그리고 헤이그의 중재 노력이 아직 끝나지 않은 4월 13일, 미국은 어센션에 모아 둔 120만 갤런의 연료 중에서 95만 갤런을 영국군이 써도 좋다고 합의해 몰래 영국 편을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군이 어센션에서 쓴 모든 연료는 영국군이 가지고 온 것이었지만 연료 저장 시설만은 미국이 만들어 둔 것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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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전쟁 중 어센션 섬의 와이드어웨이크 공군기지

빅터 K2 급유기, 님로드 MR2 해상초계기,

AIM-9 사이드와인더로 무장하고 요격기 역할을 맡은 해리어 GR3 공격기가 보인다.

                     

첫 벨파스트 수송기가 도착하고 5일 지난 4월 10일, 구축함 <앤트림>이 이끄는 군함들이 어센션에 도착했고 지브롤터 앞바다에서 스프링트레인 훈련에 참가했던 나머지 군함들이 이틀 지나서 어센션에 왔다. 이어 16일에는 기동부대의 기함인 항공모함 <허미즈> 전단, 17일에는 항공모함 <인빈서블>과 상륙함대 기함인 상륙함 <피어리스>가 이끄는 함대가 어센션에 도착해 영국 기동부대가 모두 모였다. 영국군의 헬리콥터들은 워낙 급히 떠나느라 뒤죽박죽으로 실린 인원과 물자를 재배치하기 위해 하루에 수백 번씩 군함과 기지 사이를 날아다녔고 항공모함 기동부대 사령관 샌디 우드워드 해군소장, 상륙함대 사령관 마이클 클랍 해군준장, 지상군 사령관 줄리언 톰슨 해병준장의 첫 회의가 4월 16일 상륙함 <피어리스>에서 열렸다.

      

우드워드 해군소장의 3가지 아이디어

     

클랍 해군준장과 톰슨 해병준장은 “Plan to land with a view to repossession”이라고 명령을 받았는데 이것은 “포클랜드의 탈환/수복을 염두에 두고 상륙을 계획하라”는 뜻이었다. 클랍 해군준장은 이것이 동 포클랜드 섬에, 그것도 되도록이면 수도 스탠리에 가깝게 상륙하되 꼭 곧바로 스탠리로 진격해서 결전을 벌이는 것은 아니고 아르헨티나군의 야포 사거리 밖에 진을 치고 정부가 결심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톰슨 해병준장도 이와 같이 이해했고 이 둘은 일단 상륙하면 포클랜드의 완전 탈환이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동 포클랜드 섬뿐만 아니라 서 포클랜드 섬에라도 상륙해서 전폭기들을 배치할 비행장을 건설하는데 관심이 있었고, 영국이나 아르헨티나 어느 쪽도 상대방을 포클랜드에서 완전히 쫓아내지는 못하는 상황이 몇 달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포클랜드 주변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해 포클랜드에 주둔한 아르헨티나군을 고립시키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클랍 해군준장 및 톰슨 해병준장과의 회의에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첫째는 포클랜드의 수많은 작은 섬들 중의 하나인 <카커스> 섬 또는 <던바> 섬에 상륙해 이곳을 보급기지로 만드는 것이었고 둘째는 서 포클랜드 섬에 상륙해서 이곳에 영국공군의 F-4M 팬텀 전투기를 배치할 활주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마지막 셋째 아이디어는 클랍 해군준장과 톰슨 해병준장을 너무나 놀라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만들었는데, 상륙함대의 기함 <피어리스>를 미끼로 써서 아르헨티나 본토의 해안으로 접근시키고 이에 맞서 아르헨티나공군과 해군이 나오면 이들을 요격한다는 것이었다. 아르헨티나공군과 해군을 끌어내 요격하겠다는 생각 자체는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상륙함대 사령관과 지상군 사령관이 탄 상륙함대의 기함 <피어리스>를 미끼로 쓴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었고, 다행히 아이디어로 끝나고 말았다. 서 포클랜드 섬에 F-4M 팬텀 전투기를 배치할 활주로를 건설하는 것 또한 끊임없는 공습을 무릅쓰고 해야만 하는 어려운 작업이었고 상륙함대에는 활주로 건설에 필요한 자재나 장비가 없었다.

        

이 회의는 우드워드 해군소장이 비록 계급은 높지만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본국에 있는 기동부대 사령관 (CTF, Commander Task Force) 필드하우스 해군대장에게 보고하는 3명의 전단 사령관 (CTG, Commander Task Group)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 클랍 해군준장과 톰슨 해병준장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 이유는 독립적인 지휘관들인 클랍 해군준장과 톰슨 해병준장을 우드워드 해군소장이 마치 자신의 직속 부하처럼 다루면서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고 의견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두 준장들이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지휘계통의 문제는 다음날 필드하우스 해군대장이 어센션 섬 앞바다에 정박한 항공모함 <허미즈>로 날아와 이들을 모두 불러 회의를 가지면서 비로소 해결되었다. 필드하우스 해군대장은 클랍 해군준장과 톰슨 해병준장에게 우드워드 해군소장에게 보고하지 말고 자신에게 직접 보고하라고 확인시켜 주었고 상륙 작전의 계획을 이들에게 맡겼다.

     

아르헨티나의 대응

        

영국 기동부대가 어센션 섬에 모였을 때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 또한 포클랜드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포클랜드에 배치된 육군 9여단의 25연대와 8연대에 더해 새로이 3연대, 6연대와 7연대로 이루어진 10여단이 여객기와 수송기를 이용해 포클랜드로 보내졌고, 공군은 포클랜드에 침공한 4월 2일에 보냈던 아르헨티나 자국산 IA-58 푸카라 쌍발 터보프롭 공격기 4대에 더해 8대를 새로 보냈으며, 해군항공대는 이탈리아제 MB-339A 제트 훈련기 겸 공격기 6대와 미국제 T-34C 터보 멘터 터보프롭 훈련기 겸 공격기 4대를 포클랜드로 보냈다.

        

그런데 4월 12일 영국 정부가 포클랜드 주변 200 노티컬 마일의 바다를 <해상 봉쇄 구역>으로 선포하고 영국해군의 핵추진 공격형 잠수함 <스파르탄>과 <스플렌디드>가 해상 봉쇄 구역 안으로 아무도 모르게 들어와 있었을 때, 아르헨티나 본토에서는 4척의 수송선이 포클랜드로 떠날 참이었다. 그러나 해상 봉쇄 구역이 선포되고 영국해군의 또 다른 핵추진 공격형 잠수함인 <수퍼브>가 남대서양에 있다고 영국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하자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이 4척을 포클랜드로 보내는 것을 망설였다. 해상 봉쇄 구역 안에 2척의 잠수함이 있었지만 이들은 아직 어떤 표적도 공격하도록 허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정부의 해상 봉쇄 구역 선포는 사실 허풍이었다. 그러나 멀리 다른 곳에 있던 잠수함 <수퍼브>가 남대서양으로 갔다는 영국 언론의 "오보"는 해상 봉쇄 구역 선포가 허풍이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고,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그대로 속아 넘어갔다.

        

그리하여 포클랜드에 배치된 육군 10여단이 쓸 취사 도구를 포함한 각종 물자를 실은 수송선 <포모사>는 항구를 떠나지 못했고, 한 때 식량은 겨우 이틀 분량만 남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영국 잠수함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병사들이 굶주리게 둘 수는 없었기에 결국 위험을 무릅쓰고 <포모사>를 포함한 4척의 수송선들이 호위함이 붙지 않은 채로 각각 따로 포클랜드를 향해 떠났고, 10여단에 이어 포클랜드에 추가로 배치된 육군 3여단의 중장비와 물자를 실은 수송선 <치우다드 드 코르도바>를 제외한 3척은 무사히 도착했다. <치우다드 드 코르도바>는 항구를 떠나고 곧 암초에 부딪혀 뱃머리를 돌릴 수 밖에 없었고 3여단은 중장비와 물자를 받지 못한 채로 싸우게 된다. 그러나 항공기는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를 오가는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고, 아르헨티나공군의 C-130 허큘리즈 수송기, 국영 및 민간 항공사의 보잉 737 여객기, 포커 28 여객기, BAC 111 여객기는 500회 이상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를 오가며 약 10,700명의 인원과 5,500톤의 물자를 포클랜드로 날랐다.

       

선제 공격을 금지하는 교전 수칙을 악용한 정찰

        

4월 18일, 영국 기동부대가 어센션 섬을 떠나 남하한다는 정보가 아르헨티나의 수중에 들어왔다. 영국이 기동부대를 보내면서부터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모든 아르헨티나의 민간 선박과 항공기에게 영국 기동부대의 움직임을 감시하도록 요청했고, 마침 어센션 섬 근처에 있던 상선 <리오 데 라 플라타>는 아르헨티나해군으로부터 주변에 머무르도록 특별히 명령을 받았다. <리오 데 라 플라타>의 선장 <카를로스 벤체트리트>는 이러한 정찰을 위해 해군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바 있어 이 임무에 적임자였고, 그는 영국 기동부대의 어센션 섬 출발을 발견하고 보고해서 나중에 훈장을 받게 된다.

         

이제 영국 기동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찾는 임무는 아르헨티나공군에게 맡겨져 보잉 707 수송기가 장거리 정찰기의 역할을 맡고 넓은 남대서양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찰 비행은 마치고 돌아오는데 약 15시간까지 걸렸고, 보잉 707은 원래 민간용 여객기로 만들어져 영국공군의 님로드 MR2 해상초계기에 달린 서치워터 레이더같이 표적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아볼 수 있는 고성능 레이더는 없었다. 대신 보잉 707은 앞에 달린 기상관측 레이더를 해상탐색에 쓰는 편법을 동원했는데, 이것으로도 대서양을 내려 오는 영국 기동부대를 찾는데 충분했다. 4월 21일, 아르헨티나공군의 보잉 707 수송기는 기상관측 레이더로 어센션으로부터 포클랜드까지 거리의 약 1/3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는 영국 기동부대를 탐지했다.

         


아르헨티나공군의 보잉 707 수송기

                 

이 보잉 707은 영국 군함의 대공경보 레이더에도 160 마일 거리에서 잡혀 항공모함 <허미즈>의 800대대의 시해리어 FRS1 전폭기 1대가 날아 올라가 고도 35,000 피트에서 보잉 707과 만났다. 시해리어 조종사의 눈에는 보잉 707의 아르헨티나공군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지만 무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영국군의 교전 수칙은 비무장 항공기에 대한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르헨티나공군의 보잉 707이 영국 기동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 온 정찰기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지만 교전 수칙이 바뀌지 않는 한 시해리어는 보잉 707을 격추시킬 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사진만 찍고 돌아갔다. 보잉 707 또한 시해리어의 사진을 찍었고, 더 이상 영국군의 인내력을 시험하지 않고 현명하게 기수를 돌려 아르헨티나로 돌아갔다.

        


82년 4월 21일 시해리어에게 쫓겨나는 보잉 707

                 

다음 날 새벽, 영국 기동부대의 레이더 화면에 무엇인가 또 나타났다. 이번에는 140 마일 거리에서 잡혔고, 항공모함 <인빈서블>의 801대대의 시해리어 FRS1 전폭기 1대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출격했다. 시해리어는 영국 기동부대로부터 65 마일 떨어진 곳에서 항법용 불빛을 깜빡이는 대형 항공기를 눈으로 확인하고 북서쪽으로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 대형 항공기는 기수를 급히 남쪽으로 돌렸고, 민간 여객기라면 이런 행동을 보일 리는 없었다. 다름 아닌 아르헨티나공군의 보잉 707이었다.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보잉 707은 비무장이지만 선제 공격을 금지하는 영국군의 교전 수칙을 악용해서 영국 기동부대에 거리낌없이 다가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공격기나 잠수함을 유도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실제로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해군은 동부 지중해에서 소련해군이 정찰기나 미국해군이 'tattletale'이라고 불렀던 미행 구축함으로 미국해군 항공모함을 따라다니며 정확한 위치를 항상 파악하고 있다가 폭격기, 잠수함, 수상전투함을 총동원해 갑자기 기습 공격을 하면 대책이 없기 때문에 선제 공격을 금지하는 교전 수칙을 악용하는 이러한 전술에 대하여 많이 걱정했다.

     

민간 여객기를 격추시킬 뻔했던 순간

           

아르헨티나공군의 보잉 707이 두 번째로 나타나고 16시간이 지나서 또 다시 무엇인가 영국 기동부대로부터 120 마일 거리에서 레이더에 잡혔고, 항공모함 <인빈서블>은 이번에는 2분 안에 2대의 시해리어를 올려 보내고 다시 3분 지나 1대를 더 보냈다. 이 시해리어 3대는 아르헨티나공군 보잉 707을 둘러싸고 영국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침입자를 격추시킬 수 있다는 무력 시위를 했고,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3대씩이나 보낼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본국 사령부와의 DSSS 위성통신 대화에서 아르헨티나공군이 보잉 707을 또 보내면 격추시켜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위성통신 대화에서 합의된 것은 곧 영국군이 탈환 작전을 벌일 사우스 조지아 섬 근처로 아르헨티나공군의 보잉 707이 오면 격추시켜도 된다는 것이었지만 DSSS 위성통신의 낮은 통화 품질 때문에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자신의 기동부대 근처로 오는 보잉 707을 격추시켜도 되는 것으로 이해했고, 이 때문에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과 비슷한 참사가 일어날 뻔 했다.

       

4월 23일 저녁 7시 10분, 영국 기동부대의 레이더는 250 노티컬 마일 거리에서 높이 날고 있는 항공기를 탐지했다. 이 항공기는 레이더를 켠 채로 영국 기동부대를 향해서 날아왔고, 항공모함 <인빈서블>은 언제든지 시다트 함대공 미사일을 쏠 수 있도록 909형 사격통제 레이더를 이 항공기에 록온(lock-on)했다. 이 미확인 항공기는 아무 거리낌없이 영국 기동부대로 다가왔고, 지금 이 시각에 이곳을 지날 민간 여객기가 없음을 확인한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이것이 아르헨티나공군의 보잉 707이 분명하다고 여기고 이번에는 격추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시다트 발사 1분 전, 이 미확인 항공기가 어쩌면 민간 여객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친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이 항공기의 경로를 지도에서 앞뒤로 쭉 이어보도록 명령했고, 이어진 선은 남아프리카의 <더반>과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를 지났다. 정신이 번쩍 든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발사 20초 전에 모든 무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Weapons Tight!" 명령을 내렸다.

          

이어 날아오른 시해리어의 조종사는 이 항공기가 브라질 항공의 DC-10 여객기임을 눈으로 확인했고 이 때가 저녁 7시 30분이었다. 수백 명의 무고한 여객기 승객들이 목숨을 잃을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이 때 우드워드 해군소장이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시다트 함대공 미사일을 브라질 항공 DC-10 여객기에 쏘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수백 명이 죽고, 영국 기동부대는 본국으로 소환되며 포클랜드는 아르헨티나의 영토로 굳어졌을 것이라고 자신의 회고록 <One Hundred Days>에서 밝힌 바 있다. 이 사건은 순간의 판단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고, 아르헨티나공군은 영국이 아르헨티나 현지 시각 23일 오후 5시 20분에 스위스 대사관을 통해서 아르헨티나공군 보잉 707이 또 다가오면 격추시키겠다는 경고를 아르헨티나에 전달한 다음부터 정찰 비행을 중단했다.
        
사우스 조지아 탈환 작전

      

아르헨티나공군의 보잉 707이 영국 기동부대를 찾기 위한 정찰 임무에 투입되기 하루 전인 4월 20일, 어센션 섬의 와이드어웨이크 공군기지에서는 각각 48톤의 연료를 실은 영국공군의 빅터 K2 급유기 4대가 1분 간격을 두고 차례로 날아올랐다. 이들의 임무는 2,850 마일 떨어진 사우스 조지아 섬 근처의 바다에 아르헨티나 군함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4대 중의 1대만 사우스 조지아 섬까지 날아가서 정찰을 하고 나머지 3대는 이 1대에게 연료를 공중 급유할 계획이었는데, 원래 정찰 임무를 맡을 예정이었던 빅터 K2의 일부 장비가 고장 나자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서 예비로 포함된 <존 엘리엇> 공군소령의 빅터 K2가 정찰 임무를 대신 맡게 되었다.

          

이륙하고 2시간이 지나 어센션 섬으로부터 남쪽으로 1,000 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2대의 빅터 K2는 다른 2대의 빅터 K2에게 연료를 공중 급유하고는 기수를 돌려 어센션 섬으로 돌아갔다. 다시 2시간이 지나 또 1,000 마일을 날아갔을 때 남은 빅터 K2 1대가 엘리엇 공군소령의 빅터 K2에게 연료를 주고는 돌아갔고, 엘리엇 공군소령의 빅터 K2는 사우스 조지아 섬의 북동쪽 끝 근처에 도착하자 고도를 43,000 피트에서 레이더를 이용한 해상탐색에 가장 알맞은 고도인 18,000 피트로 낮추고는 기수에 달린 H2S 레이더를 이용해 넓은 바다를 훑기 시작했다.

          

빅터 K2는 1962년부터 영국공군에 배치된 4발 제트 전략폭격기 빅터 B2를 급유기로 개조한 것이었고, 원래 전략폭격기였기 때문에 폭격용 H2S 레이더가 기수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비록 이제는 폭탄이 아니라 연료를 싣는 급유기이지만 영국공군은 빅터 K2를 레이더를 이용한 정찰 임무에 쓸 수 있었고, 사실 영국공군 543대대는 앞서 1966년 5월부터 1974년 5월까지 빅터 B2 폭격기를 개조한 전략 정찰기인 빅터 SR2 6대를 가지고 해상 레이더 정찰 (Maritime Radar Reconnaissance, MRR) 임무를 수행했었다. 1974년 빅터 SR2 정찰기가 빅터 K2 급유기로 개조되면서 대신 27대대의 벌컨 B2 폭격기가 해상 레이더 정찰 임무를 이어 받아 1974년 6월부터 1982년 5월까지 수행했고 벌컨 B2는 이러한 임무를 맡아 소련해군의 항공모함 <키에프>의 위를 지나가기도 했다.

 

소련해군 항공모함 키에프 위를 지나가는 벌컨 B2. 벌컨에게 경고하기 위해 플레어가 발사됨.

 

 1978년 영국해군 항공모함 아크 로열 위를 지나가는 벌컨 B2.

                  

만약 빅터 K2가 레이더로 탐색할 곳에 아르헨티나해군의 영국제 42형 구역방공 구축함이 있다면 빅터K2가 42형 구축함이 쏘는 시다트 함대공 미사일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빅터 K2에 달린 레이더 경보 장치가 42형 구축함의 909형 사격통제 레이더가 내는 전파를 잡아내면 재빨리 방향을 돌리고 급강하해서 시다트의 사거리 밖으로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빅터 K2는 남쪽으로 날며 레이더로 해상을 훑은 다음 방향을 서쪽으로 꺾어 90 마일을 날고, 그 다음 북쪽으로 꺾고는 120 마일을 날며 레이더로 해상을 탐색했다. 이어 서쪽으로 90 마일, 남쪽으로 120 마일, 다시 서쪽으로 90 마일, 북쪽으로 280 마일을 날며 빅터 K2는 1시간 반에 걸쳐 15만 평방 마일의 해상을 레이더로 훑었고, 이 면적은 영국 본토 전체보다도 넓었다. 사우스 조지아 섬 근처에 군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엘리엇 공군소령의 빅터 K2가 어센션 섬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륙한지 14시간 45분이 지났고, 이 빅터 K2는 7,000 마일 이상의 거리를 날아 당시 가장 긴 정찰 비행 기록을 세웠다. 빅터 K2의 정찰 결과에 따라 영국군은 사우스 조지아 섬을 탈환하는 <패러켓 작전>을 개시했다.

출처 : When Computers Went To Sea
글쓴이 : 백선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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