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스 조지아 섬을 영국군이 되찾고 1982년 4월의 마지막 날이 다가올 때, 아르헨티나 육해공 3군은 곧 포클랜드에 나타날 영국기동부대와 맞싸우기 위해 맹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앞서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전쟁을 막아보겠다고 런던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오가는 셔틀 외교를 벌인 미국의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의 노력 또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영국 편으로 돌아선 미국
헤이그의 제안은 두 나라가 모두 군대를 철수시키고,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다국적 기구가 포클랜드를 통치하는 동안 포클랜드의 주민의 뜻을 반영해서 포클랜드의 주권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지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헤이그의 제안은 영국은 물론이고 아르헨티나 또한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들은 상대방이 먼저 미국의 이 제안을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모양새를 만들기 위해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둘 중에서 먼저 인내력이 다한 쪽은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이미 국민들에게 포클랜드는 이제 아르헨티나 땅이고 절대로 철수하는 일은 없다고 큰소리를 친 터라 헤이그의 제안대로 일단 군대를 철수시킬 수는 없었다.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뒤집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헤이그의 제안을 거부하기로 4월 27일에 결정을 내렸고, 이틀이 지난 4월 29일 헤이그에게 공식적인 거부를 밝혔다. 기다린 덕분에 영국은 미국의 중재 노력을 좀 더 존중한다는 인상을 주는데 성공했고, 4월 30일 헤이그 국무장관은 “미국은 (아르헨티나의) 불법적인 무력 사용을 용인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혀 이제 미국은 영국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같은 날 영국해군 기동부대는 영국이 4월 12일부터 봉쇄하겠다고 4월 7일에 발표한 포클랜드 주변 200 노티컬 마일의 (약 390km) 바다인 <해양봉쇄구역 Maritime Exclusion Zone, MEZ>에 도착했고, 이 날 그리니치 표준시 11시부터 MEZ 위의 하늘까지 봉쇄하기 시작해 MEZ는 이제 <완전봉쇄구역 Total Exclusion Zone, TEZ>가 되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본격적인 전쟁은 다음 날 5월 1일부터 이 아르헨티나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역사상 가장 먼 거리를 날아온 폭격기
5월 1일 새벽 4시 46분, 포클랜드의 수도 스탠리의 비행장 관제탑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알베르토 이아나리엘로> 공군소령은 갑작스런 엄청난 폭발 소리에 깜짝 놀랐다. 순식간에 붉은 버섯 구름이 관제탑으로 밀려와 건물을 흔들며 모든 유리창을 다 깨부쉈고, 이아나리엘로 공군소령은 의자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붉은 버섯 구름의 폭풍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리자 그는 철모를 쓰고 소총을 집어 들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놀란 병사들이 뛰어다니고, 다친 사람들이 신음하고, 여기저기서 화염이 치솟으며 뒤늦게 대공포가 하늘로 불을 뿜는 비행장은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이 폭발 소리는 스탠리의 주민들도 모두 들었고, 영국인의 후손인 스탠리의 주민들은 이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곧바로 깨닫고 감격했다. 포클랜드를 되찾기 위한 영국군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스탠리를 깨운 것은 영국공군의 벌컨 B2 전략폭격기 1대가 6,400km 떨어진 어센션 섬에서부터 이곳까지 날아와 던진 454kg 폭탄 21발이었다. 벌컨은 1956년부터 영국공군의 폭격기 사령부에 배치된 4발 제트엔진 전략폭격기였다. 벌컨은 앞서 1954년에 배치된 밸리언트 및 좀 더 늦게 1958년부터 배치된 빅터와 함께 영국공군의 <V-bomber> 3총사를 이루었고, 영국의 핵무기 전력의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다. 벌컨은 전성기인 1961년에 미국 동해안에서 벌어진 미국공군의 <스카이쉴드> 훈련에 참가해 성능을 과시했는데, 이 훈련에서 스코틀랜드에서 발진한 벌컨 4대는 북쪽으로부터 침투하고, 대서양에 있는 영국 영토인 버뮤다 섬에서 발진한 다른 4대는 남쪽으로부터 침투했다. 북쪽 4대는 요격기들이 제대로 올라올 수 없었던 고도 17,000m로 (보잉747과 같은 국제선 여객기들은 보통 10,000m로 난다) 미국공군의 B-47 및 B-52 폭격기들과 함께 날아 들어가 벌컨 4대 중의 1대만 미국공군 F-101B 요격기의 사격통제 레이다의 전파를 받았지만 전파 방해를 하면서 무사히 빠져 나왔다. 한편 남쪽 4대는 320km에 걸쳐 옆으로 퍼져 미국 동해안으로 다가가다가 가장 남쪽의 1대가 북쪽으로 방향을 갑자기 바꾸고 위쪽 3대가 전파 방해를 하는 동안에 완전 무방비 상태의 뉴욕을 덮쳤다.
V-bomber 3총사
벌컨 B1 폭격기
벌컨은 1960년대에는 이렇게 미국의 방공망도 뚫는 강력한 폭격기였지만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82년 5월 1일에는 6월 30일로 예정된 퇴역을 딱 두 달 앞둔 낡은 폭격기였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군이 4월 2일 포클랜드를 침공해 점령하고 영국군이 부랴부랴 포클랜드를 되찾기 위한 작전을 짤 때 벌컨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제 전투에서 폭탄을 던질 기회가 찾아왔다. 2차 세계대전 때 랭커스터 폭격기 조종사였던 영국공군 참모총장 <마이클 비덤> 공군대장은 454kg 폭탄 21발을 실은 벌컨 폭격기 1대를 보내 스탠리 비행장의 활주로를 부술 수 있다고 주장했고, 그의 주장은 2척의 항공모함에 탑재된 시해리어 FRS1 전폭기 20대만으로도 스탠리 비행장 폭격과 함대 방공을 모두 할 수 있다는 해군 일부의 반대를 누르고 받아들여졌다.
21발의 폭탄을 실은 벌컨 B2를 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어센션 섬에서 6,400km 떨어진 포클랜드까지 보내려면 당연히 공중 급유가 필요했다. 그런데 문제는 폭탄을 가득 실은 벌컨 B2 폭격기 1대가 6,400km 떨어진 표적까지 가려면 공중 급유를 무려 5번이나 받아야만 하고, 벌컨 B2에게 공중 급유를 해줄 빅터 K2 급유기 자신도 공중 급유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영국공군의 작전 계획자들은 2대의 벌컨 B2 폭격기와 11대의 빅터 K2 급유기가 동원되어 급유기들끼리 서로 연료를 주고받고, 그 다음 폭격기에게 연료를 주는 복잡한 작전을 짜냈다. 이 작전의 이름은 <블랙 벅>이었고, 2대의 벌컨 B2 폭격기 중의 1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예비였고 11대의 빅터 K2 급유기 중에도 예비가 포함되었다.
어센션 섬 와이드어웨이크 비행장의 빅터 K2 급유기들과 버커니어 S2 공격기 2대에 급유하는 빅터 K2
4월 30일 밤 10시 50분, 빅터 K2 급유기 11대와 벌컨 B2 폭격기 2대가 1분 간격으로 차례로 날아올랐다. 그런데 스탠리 비행장을 폭격하기로 원래 계획된 벌컨 B2에서 고장이 발생했고, 바로 이런 경우에 대비해 작전에 포함된 예비 벌컨 B2가 대신 포클랜드까지 날아가게 되었다. 이 기체번호 XM607 벌컨 B2의 조종사는 영국공군에서 복무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인 <마틴 위더스> 공군대위였고, 그는 임무를 대신 맡게 되자 다른 4명의 승무원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가 일을 맡아야 할 것 같다.”
위더스 공군대위가 조종하는 벌컨 B2는 빅터 K2 급유기들로부터 원래는 4번만 급유를 받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빅터 K2 급유기들이 서로 급유를 하는 도중에 한 빅터 K2의 공중 급유 장치가 부러지는 예상치 못한 사고가 터졌다. 그래서 2대의 빅터 K2들은 원래 연료를 주고 떠나야 할 급유기가 공중 급유 장치가 부러진 다른 급유기로부터 대신 연료를 받는 임기응변을 발휘해야만 했고, 연료를 원래 계산보다 많이 쓰게 된 벌컨 B2에게 다시 한번 급유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2대의 빅터 K2 급유기들이 서로 연료를 주고 받을 때 난기류에 번개까지 치는 아찔한 순간이 있었고, 온갖 어려움 끝에 연료를 받은 벌컨 B2는 스탠리 근처에 설치된 아르헨티나군의 미국제 TPS-43 대공탐색 레이더의 감시 범위에 다가가자 이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었다.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모든 레이더는 <레이더 수평선> 아래로 날아오는 표적은 탐지할 수 없다. 이 레이더 수평선 아래로 파고들기 위해 벌컨 B2는 고도를 90m까지 낮췄고, 원래는 달려있지 않았지만 이 작전을 위해서 급히 설치된 관성항법장치가 벌컨 B2를 표적까지 제대로 인도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H2S Mk9A 폭격 레이더를 켜고 스탠리 비행장 주변의 지형지물을 찾았다. 그러나 레이더 화면에 나타나야 할 높이 700m의 유스본 산의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고, 자신이 너무 낮게 날기 때문에 산꼭대기가 H2S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것인지 의심한 위더스 공군대위는 고도를 150m로 올렸다. 그러자 유스본 산의 꼭대기가 항법사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 레이더 화면의 바로 그 자리에 나타났고, 벌컨 B2는 동서로 뻗은 스탠리 비행장 활주로를 30도 각도로 가로지르며 21발의 454kg 폭탄을 한 줄로 뿌리는 공격 단계로 들어갔다. 그런데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벌컨 B2가 잠시 고도를 올렸을 때 벌컨 B2의 레이더 경보 장치는 10초 간격으로 높은 음의 경보를 울렸다. 레이더 경보 장치가 10초에 1번 회전하는 TPS-43 레이더의 전파를 잡았다는 뜻이었다.
공격 단계로 들어간 벌컨 B2는 폭탄이 활주로 밑으로 뚫고 들어가서 터질 수 있는 충분한 운동에너지를 주고, 스탠리 비행장을 지키는 스위스제 엘리콘 35mm 대공포를 피하기 위해 고도를 3,000m로 올렸다. 벌컨 B2의 폭격 계산기는 H2S 레이더로 얻은 표적까지의 거리와 벌컨 B2의 고도 및 속도를 가지고 폭탄을 던질 곳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계산해 계기판에 표시했는데, 이 때 갑자기 레이더 경보 장치가 또 다른 높은 음의 경보를 울렸다. 이 경보의 주인공은 엘리콘 35mm 대공포를 유도하는 스카이가드 사격통제 레이더의 전파였다. 바로 이런 경우를 대비해 벌컨 B2에 급히 가져다 붙인 미국제 ALQ-101 재밍 포드가 곧바로 방해 전파를 쐈고, 방해 전파에 속아 넘어간 스카이가드 사격통제 레이더는 벌컨 B2가 이미 지나가고 없는 텅 빈 하늘을 뒤졌다. 이윽고 스탠리 비행장 활주로에서 3,200m 떨어진 곳에서 벌컨 B2는 21발의 454kg 폭탄을 5초 만에 모두 쏟아 붙고 급선회해서 빠져나갔고, 고도 3,000m에서 벌컨 B2의 속도만큼 앞으로 던져진 이 폭탄들은 한 줄로 떨어지며 차례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첫 폭탄은 스탠리 비행장 활주로의 한가운데에 떨어져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었고, 나머지 20발은 활주로 주변에 한 줄로 20개의 구덩이를 파냈다. 활주로의 가운데에 난 구덩이는 활주로의 길이를 반으로 줄인 셈이었고, 이것만으로도 스탠리 비행장에 배치된 MB-339A 제트 훈련기 겸 공격기는 물론 이곳에 배치되지 않은 미라지 III 전투기나 쉬페르 에탕다르 공격기를 여기에 보내 운용하는 가능성을 없애기에 충분했다. 더욱 큰 전략적인 의미는 영국공군이 아르헨티나 본토를 폭격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르헨티나공군의 걱정거리로 작용하게 된다.
벌컨 2대가 던진 2줄의 21발 폭탄 흔적이 있는 스탠리 비행장
209형 잠수함 산 루이스의 전투
앞서 영국해군 기동부대가 포클랜드로 다가올 때, 아르헨티나해군은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항공모함 <베인티싱코 데 마요>, 시다트 함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42형 방공구축함 2척을 주력으로 하는 79.1 기동부대와 경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 엑조세 MM38 함대함 미사일로 무장한 섬너급 구축함 2척으로 이루어진 79.3 기동부대를 4월 27일에 출동시켰다. 그런데 이들보다 2주 이상 앞선 4월 11일에 몰래 출동한 군함이 1척 있었고, 이 군함은 아르헨티나해군은 가지고 있던 3척의 잠수함 중의 1척인 <산 루이스>였다.
<산 루이스>는 1974년 독일에서 구입한 209형 잠수함 2척 중의 1척이었고 (다른 1척은 <살타>였다) 209형 잠수함은 1967년부터 독일의 선박건조회사 <Kieler Howaldtswerke>가 수출용으로 만들어 팔기 시작한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이었다. 첫 주문은 1967년 그리스해군으로부터 왔고 2년 지나 1969년 아르헨티나해군이 2척을 주문해 두 번째 고객이 되었다. 그리스해군이 주문한 4척은 209/1100형으로 잠수했을 때의 배수량이 약 1,200톤이었고 아르헨티나해군이 주문한 2척은 209/1200형으로 약간 더 커서 물 속에서 배수량이 거의 1,300톤에 달했다.
<산 루이스>의 승조원은 32명이었고, 최대 속력은 물 위로 공기 흡입/배출 파이프인 <스노클>을 올렸을 때는 11 노트, 물 속에서는 21.5 노트에 달했으며, 항속거리는 스노클을 올리고 8 노트로 달릴 때 8,000 노티컬 마일, 물 속에서 배터리를 써서 4 노트로 달릴 때는 400 노티컬 마일이었다. 화력통제장치와 무장을 보면 <산 루이스>는 화력통제장치로 네덜란드의 시그날(Signaal)이 만든 M8-24를 가지고 있었고, M8-24는 3개의 표적에 대고 각각 발사된 3발의 어뢰를 동시에 유도할 수 있었다. 무장으로는 수상 표적에 대고 쏠 직경 553mm의 독일제 SST-4 (여러 매체에 보도된 바와 달리 SUT 어뢰가 아니었다) 어뢰, 수중 표적에 쏠 직경 483mm의 미국제 Mk37 어뢰가 있었으며, 모두 합쳐 14발을 싣고 어뢰발사관은 8개가 있었다. 출동할 때 <산 루이스>는 SST-4 10발, Mk37 4발을 싣고 있었다. 참고로 1987년 우리 해군이 주문한 3척은 209/1200형인데 겉보습이 좀 다르고 안에 들어간 장비들은 20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대부분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출동하고 6일 지난 4월 17일, <산 루이스>는 영국이 선포한 해양봉쇄구역 MEZ의 가장자리에 도착했고,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막판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MEZ 바깥 쪽에서 대기했다. 그러나 4월 19일 <산 루이스>의 머리 역할을 하는 M8-24 화력통제장치가 고장이 나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고장 난 M8-24는 고칠 수 없었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를 아르헨티나 본토의 사령부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통신 안테나를 물 위에 내놓고 M8-24의 어디가 어떻게 고장 났다는 무선 보고를 보내다가는 영국이 이것을 엿듣고, 게다가 전파가 날아온 곳을 삼각 측정해서 <산 루이스>의 위치를 알아낼 위험이 너무나 컸다. 결국 <산 루이스>는 M8-24의 3발 동시 유도 능력을 잃고 한번에 어뢰 1발을 하나의 표적에만 컴퓨터가 아닌 사람이 직접 사격 제원을 산출해서 쏠 수 있게 되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막판 협상이 결렬되자 <산 루이스>는 MEZ 안으로 들어가 포클랜드의 수도인 <포트 스탠리>의 북쪽 연안을 초계하도록 명령을 받았고 4월 28일 초계 위치에 도착했다. 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영국 땅인 아센션 섬에서 출격한 영국공군 벌컨 B2 폭격기가 스탠리 비행장의 활주로를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5월 1일, 영국해군 기동부대 사령관 <샌디 우드워드> 해군소장은 포트 스탠리의 북쪽 약 20 마일 떨어진 곳에 있을 <산 루이스>를 찾아 격침시키도록 22형 호위함 <브릴리언트>와 12M형 호위함 <야무스>를 보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 <허미즈>에서 <토니 호그> 해군소령이 이끄는 영국해군항공대 826대대의 시킹 HAS5 헬리콥터 3대가 각각 4명의 예비 승무원을 태우고 <허미즈>로부터 180 마일 떨어진 <산 루이스>의 추정 위치로 날아갔다.
우드워드 사령관이 <산 루이스>를 잡으러 함정 2척과 헬리콥터 3대를 마침 <산 루이스>가 있던 곳으로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영국군이 오면 곧장 포트 스탠리 주변에 상륙작전을 벌일 것으로 생각하고 <산 루이스>를 포트 스탠리의 북쪽 약 20 마일 위치로 보내는 아르헨티나해군의 무선 명령을 영국군이 엿들었기 때문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시킹 HAS5 헬리콥터 3대는 함정에 로프를 내려 예비 승무원들을 내려놓고 <산 루이스>를 찾기 시작했고 <브릴리언트>에 실린 링스 HAS2 헬리콥터 2대와 <야무스>에 실린 워스프 HAS1 헬리콥터 1대도 <산 루이스> 사냥에 합류했다. 헬리콥터들의 잠수함 사냥은 무려 10시간 이어졌다. 3대의 시킹 HAS5는 함정의 위에서 공중 정지한 채로 호스를 잇고 15분 동안 연료를 채우는 <HIFR>를 실제 전투에서 처음으로 실행하면서 3대 합쳐 모두 10번 급유를 받았고, 예비 승무원도 비슷한 방법으로 공중 정치한 헬리콥터로 올라가서 5시간여의 잠수함 사냥에 지친 승무원들과 교대했다. 이들은 <산 루이스>를 찾던 10시간 동안 Mk11 폭뢰 6발, Mk46 어뢰 2발을 잠수함으로 생각되는 표적에 대고 쐈지만 <산 루이스>는 무사했다. 이 때 거의 0.5 마일 길이의 기름 띠가 바다로 떠올라 영국해군은 <산 루이스>가 격침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이미 오래 전에 침몰한 포경선의 잔해를 부순 것이었다.
영국해군은 뭔가 탐지되면 주저 없이 폭뢰나 어뢰를 던졌는데 이것은 폭뢰나 어뢰 아끼려다가 잠수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고, 또한 탐지된 것이 정말로 잠수함이면 도망가려 할 것이고 아무 것도 아니라면 가만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영국해군은 물속에서 뭔가 탐지되면 폭뢰나 어뢰를 던져 탐지된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식별했던 것이다. 평시와 달리 전시에는 뭔가 탐지되었을 때 빨리 그것이 진짜 잠수함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면 큰일이 날 수도 있고, 자신이 살기 위해 “의심되면 일단 쏘고 본다”는 본능이 발동된다. 이런 이유로 6월 14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국해군은 200여 발의 폭뢰와 어뢰를 쏴댔고 전쟁이 끝난 다음 식별용으로 좀 더 싼 대잠무기를 찾게 된다.
3대의 시킹 HAS5 중의 1대인 VX577이 10시간 20분 동안 하늘에 떠 있는 당시 세계신기록을 세울 때 <산 루이스>는 자신을 잡으러 온 <브릴리언트>와 <야무스>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5월 1일 오전 9시 40분, <산 루이스>의 영국제 186형 음탐기에 영국 함정이 내는 것으로 들리는 소음이 잡혔다. 여기서 <산 루이스>의 함장 <Fernando Azcueta> 해군중령이 전쟁이 끝나고 5년이 지난 1987년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영국의 역사가 <마틴 미들브룩>에게 밝힌 인터뷰 내용을 보자.
“우리는 작전에 대해 충분히 준비를 하지 못한 채로 전혀 적절하지 못한 상황에서 명령을 받고 출동했습니다. 상황이 나았더라면 성공적인 작전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새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터라 승조원들이 아직 충분히 훈련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승조원들을 (1982년) 1월에 받았고, 나는 이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해낸 일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이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날 (1982년 5월 1일) 아침 우리는 영국 함정 1척을 (영국제) 186형 음탐기로 탐지했습니다. 나는 3척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수중 소음이 너무 많아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약 20 노트의 고속으로 달리고 있었고, 프로펠러 소음은 중간쯤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잠망경으로 볼 수 없었고 모든 일은 수동 음탐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10,000에서 14,000 야드 사이에서 공격했습니다. 나는 독일 AEG가 만든 유선 유도 SST-4 어뢰 1발을 오전 10시 5분에 쐈습니다. 이 공격은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화력통제장치의 핵심인 주 관제 컴퓨터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컴퓨터는 4월 19일에 고장이 났습니다. 결국 컴퓨터 없이 화력통제를 맡은 팀이 수동으로 어뢰를 쏴야만 했습니다. 나는 좋은 화력통제 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컴퓨터가 고장 난 다음부터 쭉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습니다. 또한 내 생각에는 어뢰를 쏘고 몇 분 지나 유도선이 끊어졌습니다. 우리는 좀 떨어진 거리에서 몇몇 폭뢰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고, 대잠 어뢰 소리도 들은 것 같습니다만 영국의 반격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결국 <산 루이스>는 표적이 <브릴리언트>인지 또는 <야무스>인지 확인하지 못한 채로 9~12km 거리에서 SST-4 어뢰 1발을 사람이 직접 사격 제원을 산출해서 쐈지만 유도선이 곧 끊어져버렸고 SST-4 어뢰는 표적을 맞추지 못했다. Mk11 폭뢰 6발, Mk46 어뢰 2발을 퍼부은 영국의 반격 또한 허탕을 친 셈이었다. 이 때 <산 루이스>는 바다의 바닥에 가만히 내려 앉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엔진을 꺼서 영국의 반격을 피했는데, 당시 영국해군이 쓰던 Mk46 어뢰는 바닥에 내려 앉은 잠수함이나 물 위로 떠오른 잠수함은 표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Mk46 어뢰는 물 위로 떠오른 잠수함도 공격할 수 있도록 개량된다. 바닥에 내려 앉은 잠수함의 경우, 이 때 영국 함정에 1950년대의 림보 (Limbo) 폭뢰투사기가 있었더라면 폭뢰를 퍼부어 <산 루이스>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림보 폭사투사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이미 구시대의 무기로 간주되어 22형 호위함 <브릴리언트>에는 아예 설치되지 않았고, 원래 림보 폭사투사기가 달려있었던 12M형 호위함 <야무스>는 10여 년 전에 헬리콥터 비행갑판을 새로 만들면서 림보 폭사투사기를 떼어버렸다. 북대서양의 깊은 바다에서 소련 핵추진 잠수함을 잡기 위해 만든 함정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남대서양 포클랜드 주변의 얕은 바다에서 독일제 디젤/전기추진 잠수함을 사냥하다 보니 생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산 루이스>의 다음 기회는 5월 11일 새벽에 있었다. 5월 10일 밤, 영국해군의 21형 호위함 <얼래크러티>는 동 포클랜드와 서 포클랜드를 나누는 포클랜드 해협을 직접 통과해서 기뢰가 있는지 없는지 “몸으로 확인하라”는,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매우 위험한 임무을 맡고 포클랜드 해협의 남쪽 출구로 진입했다. <얼래크러티>는 포클랜드 해협을 고속으로 통과하다가 아르헨티나해군의 수송함 <이슬라 데 로스 에스타도스>와 마주쳐 114mm 함포로 쏴 격침시켰고, 해협을 빠져나올 무렵 같은 21형 호위함인 자매함 <애로우>가 마중 나와 있었다. 이들은 영국 기동부대 본대로 복귀하기 위해 5 마일 거리를 두고 30 노트로 달렸는데, 이들의 앞에 마침 <산 루이스>가 있었다. 함장 Azcueta 중령은 <얼래크러티>를 ‘Blanco A’로, <애로우>를 ‘Blanco B’로 지정하고 SST-4 어뢰 2발을 준비했다. M8-24 화력통제장치는 여전히 고장이 나 있어 이번에도 사람이 직접 사격 제원을 산출해 쏴야만 했다. 이윽고 <얼래크러티>가 8,000 야드까지 들어온 새벽 1시 40분, Azcueta 중령은 발사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운은 그를 돕지 않았다. 첫 번째 SST-4는 발사관에서 나가질 않았고, 두 번째 SST-4는 새벽 1시 42분 표적과의 거리가 5,200 야드일 때 발사관을 떠났지만 3분 지나 유도선이 끊어졌다는 신호가 떴다. 어뢰는 <얼래크러티>를 맞추지 못하고 대신 <애로우>가 끌고 다니던 어뢰 기만기만 날려버리고 말았다. <얼래크러티>와 <애로우>는 30 노트로 달리느라 자신이 내는 소음이 너무 커서 음탐기를 전혀 쓸 수 없었고, <산 루이스>로부터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들이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나중에 <애로우>가 어뢰 기만기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이었다.
완벽한 공격 기회를 놓친 Azcueta 중령은 사령부에 장비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보고했고, 사령부는 별 수 없이 기지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결국 <산 루이스>는 5월 17일 기지로 돌아왔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다시 출동하지 않았다. <산 루이스>의 자매함 <살타>는 <산 루이스>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아 훈련하면서 쏜 2발의 어뢰가 모두 유도 지령을 따르지 않았고 결국 <살타>는 전투에 투입되지도 못했다. <산 루이스>의 공격이 실패한 이유로 알려진 전원의 +와 -를 잘못 연결했다거나, 잠망경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설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전원의 +와 -를 거꾸로 연결하면 당장 단락이 일어나고 어뢰를 쏠 수조차 없게 된다. 하지만 <산 루이스>는 SST-4 2발, Mk37 1발 모두 3발의 어뢰를 제대로 쐈다. 발사된 3발의 어뢰 중에서 첫 번째 SST-4는 유도선이 끊어져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Mk37은 고래를 맞췄을 가능성이 높으며, 두 번째 SST-4는 어뢰 기만기에 속아넘어갔다. 결론적으로 전원의 +와 -를 잘못 연결했다거나, 잠망경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설은 자신들의 제품이 첫 실제 전투에서 영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둔 무기제조회사가 잘못을 아르헨티나해군에게 덮어씌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영국해군 항공모함 <인빈서블>이나 상륙함에 어뢰를 쏴서 맞췄지만 모두 불발했다는 이야기 또한 거짓말이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전쟁 중에 여러 이야기를 지어냈는데 그 중에는 <Daniel Antonio Jukic> 중위가 IA-58 푸카라 공격기를 몰고 항공모함 <허미즈>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는 거짓말까지 있다. 사실 Jukic 중위는 5월 1일 아침 <구스 그린> 비행장에서 IA-58 푸카라를 타고 이륙을 준비하던 차에 갑자기 들이닥친 영국해군 시해리어 FRS1 3대가 던진 클러스터 폭탄을 맞고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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